45편 - 말없이 자신을 지켜내는 사람에 관하여
도서관 복도 끝, 한적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손에 들린 책 보다 먼저, 묵직하고 분명한 공기가 느껴졌다. 주변의 정적마저 그의 기세 앞에서는 얕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단호했고, 다정하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으며, 말을 아끼면서도 삶의 방향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태도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의 숨결조차 고요했지만, 주위의 공기를 바꾸는 힘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침내 한 단어를 떠올렸다. ‘결기(潔氣)’. 이는 소리 없이 자기 자신을 지켜내 온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외부에 대한 과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힘이었다.
이 단호한 기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많은 참아온 날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여야 했던 말하지 않은 순간들, 그리고 억울함에 잠 못 이루고 뒤척였던 밤들을 통과하며 비로소 뿌리내리는 법이다. 이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외부의 압력이나 타인의 시선에 요동치지 않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스스로와 맺은 안으로 다져진 뿌리를 통해 속에서 차오른 기운을 얻는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내면의 지도를 그려내는 행위와 다름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며, 욕망과 이성 사이를 조율하는 힘을 ‘기개(thymos)’라 불렀다. 그 등불은 오늘날에도 내면의 기준에 따라 방향을 정하게 하는 힘으로 남아 있다. 이는 누군가를 압도하거나 이기기 위한 공격적인 기세가 아니다. 오히려 거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지켜내기 위한 견고한 끈에 가깝다. 그 끈은 내면의 평화를 지키고,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확립된 중심을 부여한다.
나는 회의실에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장일치로 어떤 결정에 동의할 때, 나 혼자 조용히 손을 내려놓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나는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과 분위기 속에서 말을 삼켰고, 불편한 기분을 감추며, 침묵이라는 가장 안으로 다져진 뿌리 같은 다짐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 침묵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 자신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듯한 고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확신을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교차하는 순간이었지.
그날 이후, 나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 고요한 기세를 품는 것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굳건히 지키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은근한 흐름은 겉으로 드러나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어떤 상황과 압력 속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지 않는 끈질김이다. 그것은 내면의 나침반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는 용기이자, 외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굳은 심지다. 그것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에 대한 충성심의 다른 이름이었다. 마치 좁은 방 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처럼, 조용히 빛을 지켜내는 기운이었다.
우리는 종종 오해한다. 부드러운 사람은 단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소리 없는 사람은 중심이 약하고 쉽게 흔들릴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담담한 사람이 가장 오래 버티는 끈기를 지니고 있으며, 다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과 관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그만큼 확고한 신념과 원칙이 안으로 다져져 있다. 보이지 않는 기세는 누구의 내면에나 잠들어 있으며, 때로는 아주 조용히 얼굴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길게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말보다는 태도로, 그리고 형식적인 예의보다는 자신이 풍기는 기운으로 자신의 분명한 선을 지켜낸다. 그들은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경계를 침범하려는 시도에 대해 은근하면서도 강력하게 저항한다.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조용하지만 강하다. 그 기세는 강하고 거친 말에 깃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지막한 말투,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느린 반응,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 깊이 숨어 있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이는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가 거센 바람에도 요동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존재는 부드러운 외피 아래 감춰진 견고한 바위와 같다.
어떤 침묵은 억눌림이나 체념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단호한 기운을 품은 침묵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된 평온’이다. 즉, 감정에 휩쓸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상황을 통제하고 가장 적절한 때와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고요함이다. 이는 화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불필요하게 사용하지 않기로 한 마음의 전략에 가깝다. 감정의 파도를 타기보다, 파도를 잠재우는 지혜로운 결정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적절한 감정의 표현 시점과 방식에 있다고 말했다. 이 철학적 개념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떻게 이어질까? 내면에 깃든 힘은 감정을 완전히 거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의 표현 밀도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태도다. 스스로를 지켜낸 순간은 누구에게나 남아 있고, 그것은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고요히 머문다. 이런 힘을 지닌 사람은 불필요하게 날을 세우거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아주 정확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을 무리하게 넘으려 하거나, 자신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굳이 언쟁을 벌이는 대신 말없이 등을 돌릴 줄 아는 단호함을 보인다. 이는 불필요한 소모를 막고, 자신의 에너지를 소중히 지키는 현명한 방식이 아닐까.
요즘 사람들은 갈등 상황에서 싸우기보다 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냥 제가 괜찮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불쾌함을 삼키는 순간들, 우리에게도 얼마나 흔한가.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말하기보다, 주변의 분위기나 다수의 의견에 침묵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혜로운 처신인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깊이 없는 관계가 늘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갈등이 닥쳤을 때 이렇게 말한다. “그냥 참고 지나가. 괜히 문제 만들지 마.” 겉으로 보면 평화를 지향하는 듯한 이 말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내면 기준을 포기하고 외부 상황에 순응하라는 압력일 때가 많다. SNS 속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고, 본연의 모습 대신 모두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은근한 중심을 잃은 시대는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관계의 밀도를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현대인에게 그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속 깊은 힘을 드러낼 기회도, 사회적으로 그것이 허락되는 분위기도, 그리고 내면의 여유도 부족할 뿐이다. 그 기운은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한다. 다만, 외부의 압력과 기대 속에서 감추고 사는 방식으로 변했을 뿐이다. 언뜻 사라진 듯 보이지만, 바람 속에 남은 향기처럼, 여전히 은근하게 스며 있다.
이 묵묵한 기세를 품고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대항하거나 맞서 싸우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에 가깝다. 이는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한 수많은 반복된 선택의 결과물이다. 비겁하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지나친 친절로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매일 조금씩 마음을 다듬고 단련하는 과정. 그 속에서 우리의 견고한 기세는 점점 더 깊어진다.
그 속 깊은 맥은 상처 없는 사람에게는 생겨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히려 깊은 상처를 받고도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품은 채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 그리고 삶의 무게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운 사람에게만 그 무게 있는 힘이 허락된다. 그 힘은 무너지지 않으려 애쓴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무너진 후에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새겨진 삶의 모습이자, 고통을 통해 얻은 내면의 강인 함이다. 상처는 결기를 단련시키는 가장 혹독한 스승인 셈이다. 상처의 깊이만큼 그 기세의 뿌리가 깊어지는 것 아닐까. 그 무늬는 고통을 겪어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훈장과도 같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그 흔적은 거칠지만, 멀리서 보면 오히려 빛을 품고 있다.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아레테'(ἀρετή, aretē, Excellence·탁월성)'는 외적인 결과나 성취가 아닌, 존재 방식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속 깊은 맥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자연스럽게 풍기는 기운이다.
이 힘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인식이나 평가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비록 삶의 여정에서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들은 내면의 확립된 중심만큼은 흐트러짐 없이 남겨둔다. 다정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잠시 물러서는 듯 보여도 사라지거나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 조용한 기운은 결국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계약이며, 그 계약을 지켜내려는 마음의 확고함이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장 진실한 태도인 것이다.
결기로 산다는 것은 겉으로 과시할 것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 내세울 일이 아니다. 다만 오늘 하루,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는 작은 감각이면 충분하다. 그 작은 감각이 내 삶을 지탱한다. 저녁 창밖의 바람처럼, 말없이 스쳐가도 오래 남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작은 감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다. 당신은 오늘,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도 그렇게, 내 안의 차분히 흐르는 기운을 따라 살아보기로 한다. 그 깊은 뿌리 덕에 오늘도 나는 요동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밤의 창가에 서면, 소리 없이 견고해진 마음이 스스로를 증명한다.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등불의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본문: 결기
각주: ¹ 결기의 본래 표기는 決氣.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곧고 과단성 있는 성미’로 풀이됨. 글쓴이는 여기서 潔氣로 변용하여 ‘내면을 지켜내는 고요한 힘’의 의미로 사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