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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남긴 흔적, 삶을 바꾸는 작은 우주

by 정성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말을 걸어올 때


서랍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앨범을 넘기던 투박한 손가락이 문득 멈췄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속, 앳된 얼굴의 녀석과 나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교정의 낡은 벤치, 머리 위로 쏟아지던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 막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해방감과 어른이 된 것 같던 묘한 설렘까지. 사진 한 장이 아득하게 멀어진 그날의 뜨거운 공기, 아스팔트가 내뿜던 냄새, 끈적한 감촉을 눈앞에 선명히 되살려냈다. 어느 자리에선가 나와 같은 나이테를 지니고, 저마다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겠지.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통째로 증발해 버렸지만, 이 얇은 종이 한 장이 희미해진 시간의 존재를 생생히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수많은 궤도가 교차하는 밤하늘에서 잠시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빛을 나누다 필연적으로 멀어지는 별들처럼, 예고 없이 다가왔다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무수한 순간들의 집합. 우리는 그 아득하고 불가해한 이끌림을 ‘인연’이라 부른다. 그것은 단지 만남과 헤어짐의 기록이 아니라, 과거의 한 시점이 현재의 나를 관통하며 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신비로운 과정 그 자체다. 사진 속 친구와의 짧았던 우정은 지금의 내가 누군가와 관계 맺는 방식에 보이지 않는 무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기억 저편, 당신의 앨범에는 어떤 얼굴이 잠들어 있는가.


스쳐감의 온기, 도시의 익명성에 대하여


바삐 스쳐 가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섬처럼 살아간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스마트폰 액정에 시선을 둔 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불필요한 관심과 말을 아끼려는 어른들의 방식일 것이다. 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복잡한 시장 골목을 지나던 날이었다. 한 할머니의 장바구니에서 사과 몇 알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잠시 발걸음들이 멈칫했지만 이내 다들 제 갈 길을 갔다. 그때였다. 한 젊은 학생이 말없이 허리를 숙여 흩어진 사과를 주웠고, 그 모습을 본 가게 주인도 따라나섰다. 나 역시 발밑에 굴러온 사과 하나를 주워 할머니의 바구니에 담아 드렸다. "고맙다"는 작은 목소리가 전부였고, 서로의 얼굴은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오갔던 이름 없는 온기는 그날 하루의 팍팍함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모든 만남이 서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경비 아저씨의 무뚝뚝한 목소리, 카페 주인이 말없이 컵에 그려준 작은 하트 모양, 길을 물었을 때 자기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설명해 주던 행인의 친절. 이 사소하고 작은 온기들이 우리 삶의 바닥을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 깊은 관계가 주는 위로만큼이나, 이름 모를 타인과의 순간적인 교감이 주는 온기는 메마른 일상을 견디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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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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