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나의 서재를 정리하며

한 인생의 장서목록

by 정성균

지천명(知天命)을 지나 이순(耳順)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생의 한낮이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는 때에 문득 잊었던 내면의 서재로 귀환한다. 젊은 날에는 세상의 서가를 탐독하며 지식을 모으는 데 급급했을 뿐, 정작 나의 서재는 스스로 유배 보낸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나무가 속으로 나이테를 새기듯, 내 안의 서사는 세상의 속도에 보폭을 맞추는 동안 먼지 아래 겹겹이 묻혀갔다. 육중한 문을 열자, 한 줄기 빛이 먼지의 시간을 더듬자, 묵은 종이 냄새가 숨죽인 시간의 기억을 깨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득한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이라는 장서를 정리하는 기약 없는 걸음을 뗀다.


소유라는 책의 무게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서가를 짓누르다 못해 휘게 만든 책들을 덜어내는 것이었다. 한때 나의 지성이자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던 책들. 이제는 제목조차 빛바랜 자기 계발서, 순백의 자존심처럼 한 장도 넘기지 않은 고전, 언젠가 떠날 것이라 믿으며 사두었던 낡은 여행안내서, 그리고 손때와 메모로 너덜너덜해진 자격증 수험서들이 시대의 지층처럼 쌓여있다. 그 수험서들은 더 나은 내일을 담보 잡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치열함의 증거이자, 한 시대를 관통했던 생존의 불안감이 새겨진 화석이었다. 그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식은땀이 종이 위로 번진 그날 밤의 떨림과 빽빽한 밑줄에 새겨진 젊은 날의 절박함이 희미하게 되살아난다. 책 한 권을 집어 들자 손끝에 와닿는 먼지의 서늘한 감촉. 그것은 시간의 무게이며, 끝내 가닿지 못한 열망의 재다.


책을 버리는 행위는 과거의 나를 배웅하는 의식과 같았다. 한 페이지, 한 구절에 봉인된 과거의 내가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살 때의 설렘, 저 책에 밑줄을 그으며 다졌던 결심들이 망령처럼 떠올라 현재를 붙잡는다. 묵직한 책들을 상자에 담을 때 울리는 둔탁한 소리는, 한 시절이 마침내 막을 내렸음을 고하는 장송곡처럼 들렸다.


무언가를 비운 자리에는 서늘한 공허가 먼저 찾아온다. 수십 년간 나의 일부라 여겼던 것들이 사라진 공간의 적막은 짙게 남는다. 그 적막과 온전히 대면한 후에야, 미세한 여유와 자유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내주어야 한다는 삶의 역설을 나는 먼지 자욱한 서재에서 체득한다.


관계라는 이름의 장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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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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