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 그리지 못한 삶의 별자리
어느덧 생의 한가운데, 우리는 문득 걸음을 멈춘다. 숨 가쁘게 오르던 길이 끝나고, 지나온 능선과 내려가야 할 비탈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인생의 고갯마루에 선 것이다. 세상의 소란이 한 걸음 물러서고, 이제껏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돌 틈에 낀 세월의 더께일 수도, 해 질 녘 빛이 공기 중에 새기는 미묘한 무늬일 수도 있다. 타인의 기대를 빼곡히 적은 지도를 내려놓고, 먼지 낀 채 품에 지녔던 낡은 나침반을 꺼내 들 시간. 그 바늘 끝이 가리키는 곳은 외부에 있지 않다. 가장 깊은, 내 안의 북쪽이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노후(老後)’라는 이름의 낯선 땅이다. 고요한 전율과 아득한 그리움을 안고 그 땅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곳은 우리가 언젠가 도착해야 할 미지의 장소이기 전에, 내 온기와 숨결, 살아온 이야기와 침묵으로 이미 조금씩 채워지고 있던 내면의 풍경이다. 흩어져 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그러모아 마지막 별자리를 완성해 가는 밤하늘과 같다. 그러므로 노후를 준비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미지의 땅을 향한 두려운 순례가 아니라, 본래의 나에게로 돌아가는 경건한 귀향길이다.
생애의 전환점에서는 유한함을 가장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다. 강둑에 서서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기.
젊음의 계절에 흐름은 무한히 뻗어나가는 지평선과 같았다. 미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었고, 세월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자원이라 여겼다. 그러나 세월의 문턱에서 시간은 문득 멈춰 서서 자신의 강둑을 드러낸다.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을 ‘Sein zum Tode(죽음을 향한 존재)’라 불렀다. 끝을 의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남은 나날을 어떻게 채울지 묻게 된다.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존재의 무게를 진솔하게 느끼며, 동시에 남은 날들의 가치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한 해가 저무는 속도가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고, 계절의 변화는 피부에 와닿는 감각으로 더욱 선명해진다.
세네카(Seneca)는 말했다. “우리는 시간이 적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다.”(“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tum.”)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막연한 걱정과 마음을 소진시키는 관계에 매인 의무가 많은 순간을 스쳐 지나가게 했다. 삶의 가치는 절대적 길이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밀도에 있다. 강렬한 한낮에는 사소해 보이던 것들이 오후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윤곽을 되찾는다. 그때 우리는 유한함 속에서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이제는 분주한 약속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번지는 저녁의 충만함을 더 깊이 헤아린다. 장자(莊子)는 삶과 죽음을 아침과 저녁의 교대에 비유하며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라 했다.
생은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하루의 끝에는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된다.
후반부의 여정은 내면으로 향하는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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