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소리가 가라앉는 순간, 내 안의 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우리는 그 고요 속에서 홀로 빛나는 작은 스크린을 응시한다.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며, 이미 떠나간 사람의 흔적을 더듬고, 손가락은 무의식적인 새로고침을 반복한다. 그 작은 불빛은 전자 장치의 기능을 벗어나 또 다른 신호처럼 다가온다. 꺼지지 않는 미련의 등불처럼 흔들리며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것만은 놓지 마.’
그 목소리는 바로 ‘붙듦’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다. 모든 무게의 시작이자, 우리 스스로 파고드는 가장 안락하고도 치명적인 덫이다.
우리는 내면의 집착을 곧잘 사랑이나 책임감, 혹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곤 한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이 일에 내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어.” 이 말들은 숭고하게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소유욕과 통제욕이라는 어두운 강이 흐른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만 한다는 믿음, 내 손안에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는 착각. 그것이 바로 마음을 짓누르는 압박의 씨앗이다. 당신의 열정은 혹시 무엇을 향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교에서는 인간을 괴롭히는 근본적인 번뇌로 탐(貪)·진(瞋)·치(癡)를 말한다.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욕망(탐), 그것이 채워지지 않거나 잃을까 두려워 생기는 분노와 미움(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치). 이 세 가지 독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다. 무언가를 강하게 붙들려는 마음은,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낳고, 그 공포는 대상을 향한 분노나 자기 자신을 향한 무력감으로 변질된다. 우리는 왜 무거운지조차 잊은 채, 그 무게 자체에 중독되어 버린다. 집착은 이렇듯 달콤한 독처럼 스며들어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한다.
당신의 방 어딘가, 오래 닫힌 서랍 속에는 어떤 시간이 잠들어 있는가. 빛바랜 편지, 낡은 영화 티켓, 더는 입지 않는 옷. 우리는 그것들을 버리지 못한다. 물건에 깃든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물건이 증언하는 시간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관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애틋함이 우리를 과거의 박물관 관리인으로 만든다. 우리는 소중한 기억을 지킨다고 믿지만, 사실은 지나간 시간에 현재의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현재라는 길을 걸으려니,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런 관리인이었던 적이 있다. 내 책장 한편에는 십 년도 더 된 빛바랜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와 그 안의 사유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지만, 쉽게 버리지 못했다. 첫 장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이제는 소식이 끊긴 옛 친구의 응원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 오래된 책은 젊은 날의 열망이 각인된 훈장이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증언하는 흔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턱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맑게 갠 어느 주말, 마음을 내어 그것을 정리했다. 시원함과 함께 찾아온 허전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빈자리는 곧 새로운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으로 채워졌다. 기억은 물건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여전히 호흡하며 살아 있음을, 놓아주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관계에서의 옭아맴은 더욱 교묘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내 세상의 일부로 편입시키려 한다. 그의 시간, 그의 감정, 그의 선택까지도 내 뜻대로 조율하고 싶어 한다. 그가 나의 예측을 벗어날 때 불안하고, 내게서 멀어질까 봐 두려워 더 강하게 옭아매려 한다. 사랑은 어느새 숨 막히는 감옥이 되고, 관계는 서로를 갉아먹는 족쇄로 변질된다. 성공과 명예를 향한 갈망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올라야만 한다는 강박, 남들에게 인정받아야만 가치가 증명된다는 믿음은 우리를 영원한 결핍 상태로 내몬다. 더 높이, 더 많이를 외칠수록 마음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불안의 그림자만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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