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풍경이 된다

by 정성균

2장. 상처 주지 않는 단호함에 대하여


서랍 속에 잠가 둔 나의 목소리


늦은 귀가, 현관문 디지털 잠금장치가 짤막하게 해제되는 소리가 나면 집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을 때가 있다. 방금 닫은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거실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 있는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넥타이를 풀다 문득 내 손의 거친 마디를 들여다본다. 평생 나를 위해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듯한 그 손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듬직한 상사, 책임감 있는 가장, 살가운 아들이라는 역할의 지침서를 겹겹이 따르는 동안, 정작 ‘나’라고 불리던 소년은 어느 페이지에서 길을 잃었을까. 시간은 살갗에 주름을 새기는 대신, 영혼에 겹겹의 직책을 기록했다. 거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법을 잊었고, 내 오랜 꿈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서랍 깊이 넣어둔 채 오래도록 잊고 지냈다.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는 일은 남을 겨냥한 날 선 태도보다, 퇴적된 기록 속에서 희미해진 문장을 다시 복원하는 세심한 작업과 닮아 있다. 수십 년간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느라 닳아버린 마음 한 조각을 가만히 쓸어주고, 기울어진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가장 다정한 노력이다. 상처를 남기는 말은 대개 오래 방치된 마음이 보내는 오류 신호에 가깝다. 이제 그 버팀목을 세우는 일은 관계를 지키는 일을 이어,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는 여정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경계가 허물어진 나의 시간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여백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안에 잠기거나,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채 흘려보낼 수 있는 그런 순간이다. 그러나 집안의 가장이자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오면서 그 시간의 울타리는 늘 열려 있었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요구에 무너져 내리곤 했다. 모처럼 맞은 주말 아침, 소파에 몸을 기댄 지 얼마 되지 않아 울리는 상사의 메시지, ‘팀워크’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떠넘겨지는 동료의 업무,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아들의 경제적 기반을 끝없이 확인하는 부모님의 전화. 그렇게 내 시간은 사라졌다.


이때 필요한 건 자신을 지지하는 마음가짐이다. 모든 요구에 ‘예스맨’으로 반응하는 대신, 닳아 없어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고 내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주말에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에게는 “그 건은 월요일 오전에 가장 먼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휴식의 권리를 지킨다. 무리한 부탁을 하는 동료에게는 굳은 표정 대신 차 한 잔을 건네며, 지금의 사정을 담담히 설명한다. 벽을 세우지 않고도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는 예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 문장이 사라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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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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