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계절을 나만의 걸음으로

by 정성균

1장.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약속


바람이 가르쳐준 것들


공기의 섬세한 떨림이 뺨을 스치자, 그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시간의 움직임이 비로소 드러난다. 그것은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존재의 거대한 이동이었다.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낡은 잎 하나가 마침내 제 무게를 내려놓는다.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듯, 소용돌이 같은 궤적을 그리며 흙 위에 내려앉는 그 짧고 단정한 퇴장.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경건한 작별의 기운마저 스며든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는 듯 보여도 어제의 빛과 오늘의 공기는 결코 같지 않다. 모든 순간은 단 한 번뿐인 고유한 밀도를 지닌 채 나타났다가, 영원히 사라진다. 인간은 시간을 기록하고 분초를 다투며 살지만, 정작 그 본질적인 움직임 앞에서는 무력하다. 삶의 장면들은 결국 형태를 바꾸어 또 하나의 생으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지금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존재했으나 지금은 없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의 기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서랍 깊은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앨범을 문득 꺼내 보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고 매끄럽고 차가운 사진의 표면이 손끝에 닿는다. 그 서늘한 감촉 하나가 봉인된 그 시절의 잔상을 남김없이 불러내면, 빛바랜 사진 속의 스무 살 청년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제 것인 양 환하게 웃고 있다. 저토록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짓기 위해, 그는 무엇을 믿었던 것일까. 영원한 젊음, 변치 않는 관계, 실패 없는 미래 같은 것들을 의심 없이 믿었던 것일까.


사진 속의 나는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수많은 언덕의 능선을 넘어왔다. 이 얇은 종이 한 장이 지나간 세월을 붙잡는 유일한 증거이기에,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무게는 더 깊고 무겁게 느껴진다. 기억은 언제나 우리를 흔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말했듯, 시간은 어쩌면 외부의 실체가 아닌 영혼의 깊은 자리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기억으로서, 미래는 기대로서 오직 현재의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그의 통찰은 서늘하다. 우리를 서글프게 하는 건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놓지 못하는 지금의 내면이다. 우리는 변해버린 장면 앞에서 때로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부질없이 되뇌며 과거에 머무는데, 그것이야말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저항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의 파도가 제 힘을 다해 충분히 잦아들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다음 파도를 맞이할 힘을 얻는다.


머무르지 않기에 마르지 않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나는 재래시장 한복판에 서 있곤 한다. 붉고 푸른 천막 아래 과일들이 저마다의 빛을 뽐내는 동안, 은빛 갈치 비늘 위로는 전등 불빛이 잔물결처럼 부서진다. 기름에 녹두전 지글거리는 고소한 냄새와 갓 쪄낸 옥수수의 구수한 김이 뒤섞이고, 투박한 손으로 검은 봉지를 건네는 할머니와 덤을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가 겹쳐 하나의 정겨운 소음이 된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고,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엄마의 웃음소리마저 그 안에 함께 녹아들 때, 젖은 좌판을 스치는 손끝으로는 살아있는 것들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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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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