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는 말보다 “아직 남았다”는 마음으로

by 정성균

단절의 선언과 그 이후


‘끝났다’는 말에는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말이 뱉어지는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잠시 얼어붙는 듯하다. 우리는 관계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워지거나 실패 앞에서 막막해질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말을 꺼낸다.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라기보다, 오래 억눌린 마음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내는 작은 균열의 소리에 가깝다. 인간은 불확실한 상태를 오래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끝을 맺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 말이 남긴 자리에는 서늘함이 감돈다. 서로를 향하던 작은 몸짓들과 잠을 줄여가며 매달렸던 일에 대한 열의가 힘을 잃는다. 마음속을 오가던 질문들까지 멈춘다. 기억이란 칼로 자르듯 완벽하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런 단호함을 성숙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안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듯 문을 닫아버린다. 그 문 뒤에 남는 것은 후련함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감정의 서성임이다.


남겨두기의 의미


‘아직 남았다’는 말은 다르다. 그것은 억지로 무언가를 정리하는 대신, 마음에 남은 것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다. 어쩌면 집착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대한 예의일지 모른다. 장면이 끝났어도 무대 위에 남은 희미한 흔적까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을 멋지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떨어진 조각을 가만히 주워 주머니에 넣는 모습에 한 사람의 깊이가 담겨 있다. 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고 타이밍을 놓쳐 흩어진 고백도 남는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마지막 표정 같은 완성되지 않은 장면들이 모여 우리 삶의 이야기를 더 두텁게 만든다. 단호한 결론 대신 조용한 여운, 완전한 단절 대신 이어질 가능성이 남는다.


‘끝났다’는 말이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겨울의 서리라면, ‘아직 남았다’는 말은 그 서리 속에서도 조용히 봄을 준비하는 겨울눈과 같다. 그 작은 눈 속에 다음 계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기능


살다 보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상대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고, 최선을 다한 관계에도 아쉬운 흔적이 남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밤 불쑥 어떤 기억이 되살아나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진심으로 살아냈다는 증거다.


어떤 감정은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지고, 어떤 질문은 평생 답을 찾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맴돌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 날을 살아간다. 이처럼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안고 걸어가는 것이 어쩌면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일지 모른다. 끝나지 않은 감정은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킨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배우고, 타인의 마음을 내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지혜를 얻게 된다. 기억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겪은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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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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