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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멈추지 않는 초고다

by 정성균

첫인상은 불완전한 가설이다.


긴 세월 책을 벗 삼아 세상을 배워왔다. 활자 하나하나를 좇으며, 처음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뒤집히는지 깨달았다. 인물이나 사건을 서둘러 구분할 때, 그 속에 숨은 함의까지 놓친다는 사실을 배워왔다.


며칠 전, 한 문헌 연구가를 그의 서재에서 대면했다. 방에는 오래된 문헌과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햇빛은 커튼 틈으로 들었고, 먼지는 고요히 부유했다. 그 연구원은 인사를 할 때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질의를 받을 때마다 기록용 펜을 만지작거리고 안경을 자꾸 고쳐 썼다. 그의 손에는 낡은 종이의 흔적과 연필 자국이 자리했다. 주변의 책과 필사 노트를 주시하며 '지적이지만 상대를 대하는 것에 서툰 사람'이라는 잠정 결론을 가늠했다. 어깨는 잔뜩 굳어 있었고, 말 중간의 침묵은 길어 어색하게 감지되었다. 그 멈춤을 '불안'의 신호로 해석했다.


그러나 대화의 주제가 그가 수집하는 고문서 이야기로 전환하자, 그 긴장과 침묵이 갑자기 다른 맥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한 역사적 기록의 진본성을 설명하면서, 내 눈을 정확히 마주쳤다. 목소리 톤은 낮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단단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는 "그냥 지난 이야기를 정리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수백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시대의 목소리, 그 원본성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하고 싶었죠."라고 담담히 말했다.


처음에 바라보았던 굳은 어깨나 습관적인 안경 고쳐 쓰기 같은 응대는 '소통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깊은 사색을 정확한 증거로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강한 의무 의식의 표출이었다. 존재의 다면성은 이처럼 첫 대면의 느낌에 담긴 수많은 의미의 스펙트럼으로 다가왔다. 첫 느낌은 짧은 표본에서 출발한 임시 추정에 흡사했다. 살아가는 동안 인식은 끊임없이 변한다. 지금의 이해는 퇴고 중인 원고에 머문다. 관찰이 더해질 때 비로소 가정은 모양을 얻는다. 칼 포퍼가 말했듯, 반증의 가능성이 있는 가설일수록 사실에 가까워진다. 불확실성이 남아 있을 때, 다음 시선을 이어갈 자리가 열린다. 누군가를 한 단어로 고정하면, 그 상대의 가능성은 닫힌다. 다층성(多層性)이야말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다음 가능성을 보여준다.


첫인상은 임시 표지에 붙인 메모일 뿐이다.


자리가 응대를 바꾼다.


개인의 반응을 주시할 때,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분리하지 못한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드러난 양상을 그 존재의 원래 모습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최근, 한 성공적인 IT 스타트업 경영인을 살펴본 일화가 있다. 그 지도자는 강연이나 미디어 인터뷰에서 항상 관대했으며 너그러웠다. 질의하는 이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내고, 자신의 성취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이야기하는 '직원들을 믿고 위임하는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긴축 재정 회의에서 예산을 검토하는 장면에 함께 있었다. 회의실 천장 조명이 미세하게 깜빡였고, 계산서의 단위 자릿수에 펜촉이 멈췄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감지되었다. 아주 작은 소모품 지출까지 날카롭게 분석했고,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지적했다. 목소리 톤은 낮고 단호했다. 강연장에서는 신뢰를 앞세웠다. 예산 회의에서는 효율을 앞쪽에 두었다.


이 두 지도자의 반응 양식은 장면 의존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첫 번째 모습은 '비전 제시자'라는 위치의 사회적 기대에 맞춰 청중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두 번째 모습은 '회사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경영 주체'라는 책무와 '시장의 압박'이라는 외부 환경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그의 응대는 조건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 쓰였다. 우리가 바라보는 자세는 자리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조건이 바뀌면 자세의 결도 달라진다. 한 덩어리로 잡기 어려웠다. 환경에 대응하며 계속해서 변화하는 연극적인 역할들의 집합으로 보였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를 하나의 단면으로 결론짓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대신, 그가 처한 다양한 배경의 측면들을 취합해 입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측면을 바꿔 관찰해도, 정작 과거의 내용 자체가 호출될 때마다 우리의 현재 감정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존재는 언제 본래의 자신을 드러내는가?


응대는 언제나 자리가 바뀔 때 다시 쓰인다.


회상은 끊임없이 편집된다.


긴 시간 동안 독서와 사색을 반복하면서, 떠올림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겪어본다. 과거의 내용을 남겨진 문자로 여기지만, 그것은 현재의 내 해석으로 계속해서 편집되고 새로 쓰이는 개인의 서사일 뿐이다.


몇 년 전, 한 동료와 함께 진행했던 작업은 깊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오랜 대립에 대한 회상이 오가는 동안, 회의실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점점 격해지는 목소리는 당시의 사실을 오히려 흐릿하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사건이 마무리된 후, 양측이 떠올리는 충돌의 원인과 과정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상대방은 "당신이 내 아이디어를 무시하고 핵심적인 결정을 독단적으로 확정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나는 "충분한 선택지를 제시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이 침묵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했다"라고 인식했다. 이처럼 하나의 과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서사로 재구성되어, 진실의 원형을 찾기 어렵게 했다.


이는 기억 서사의 재구성이 작동한 귀결이었다. 그때 회상은 꺼낼 때마다 달라졌다. 현재의 마음이 과거를 다시 빚은 셈이었다. 회상은 저장된 스냅사진과 똑같은 사본이 아니다. 과거를 꺼낼 때마다, 현재의 정서와 내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내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동료의 '침묵'을 '동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 셈이었다. 동료에게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자기 서사를 만들기 위해 내 자세가 '독점'으로 과장되어 파악되었다. 이미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후견지명 오류까지 더해져, 현재의 자신이 과거에도 가장 현명했다고 착각한다.


따라서 과거를 사실하게 마주하는 유일한 길은 정서적인 떠올림 대신,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습관화하는 일이다. 느낌을 적는 대신, 날짜와 시각, 직접적인 발언("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변 조건 묘사를 담은 메모만이 회상의 유동성을 억제한다. 과거는 현재의 감정이라는 필터를 거칠 때마다 달라지는 액체 같았다. 사실을 찾는 이는 이 액체를 견고한 기록의 용기에 보존해야 한다. 과거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과연 가능한 작업일까?


회상은 꺼낼 때마다 지금의 감정에 물든다. 내일의 마음에도 남아 있을 기록은 무엇일까?


머리는 자기 생각과 모순되는 정보를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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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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