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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남긴 마지막 문장에 대하여

by 정성균

저녁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숲은 하루 내내 엮어 두었던 밝기를 기척 없이 거두어갔다. 위쪽으로 번지던 색조도 서서히 묽어졌고, 나무 밑동에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달라붙었다. 지면을 스쳐온 광선은 부드럽게 방향을 틀어 새로운 분위기를 빚어냈다. 그 변화는 숨을 고르기 직전의 사람처럼 잔잔한 파동을 남겼다.


바닥 가까이에 떠다니던 작은 먼지가 하루의 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지점에 시선을 두며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의 움직임이 거의 멎은 순간, 수목이 빽빽한 내부는 그동안 감춰 두었던 면모를 자연스레 드러냈다. 가지 끝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은 어스름과 맞닿자 느린 속도로 바뀌었다. 완전히 꺼지지 않은 잔광이 남긴 공기는 오래 말하지 못한 마음이 스쳐가는 듯했다. 나는 그 고요한 틈 속에 특별한 이유 없이 서 있었다.


길목에 쌓여 있던 묵은 낙엽은 이미 메말라, 발끝이 닿자 쉽게 가라앉을 만큼 힘이 없었다. 오래된 표식처럼 겹쳐진 채 자리를 지켰고, 건드릴 때마다 얇은 마찰음만 흘렸다. 그때,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남아 있던 잔여물 하나가 지극히 느린 속도로 흔들렸다. 바람 때문일 거라 짐작했으나 주변의 대기는 정체되어 있었다. 오직 그 조각만이 스스로의 공간을 떠나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 평온한 하강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붙잡았다.


떨어지는 조각은 서쪽으로 옮겨간 빛의 동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느렸고, 정지했다고 말하기에도 분명한 방향이 있었다. 나는 그 속도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오래도록 머물렀다. 작은 형태가 공중을 가로지르며 여러 순간을 이어 붙이는 듯한 그 장면의 단면은 묘한 긴장감을 만들었다. 파편은 허공에 둥근 선을 그렸고, 그 궤적은 오랜 기억을 다시 만지는 기분이었다. 땅에 닿을 때까지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관찰하며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았다. 저 풍경이 왜 나를 붙잡는지 천천히 살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희미한 조명이 조금씩 위치를 바꿀 때마다 형태의 경계 역시 변모했다. 수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사람처럼 그 이행을 받아들였고, 시간은 다른 비율로 흐르고 있었다. 그 완만한 전환은 가슴 안쪽에 오래 머무를 정적을 남겼다.


정적 속에서 오래된 회상이 조용히 떠올랐다. 특별한 단서도, 선명한 시각적 구도도 아니었다. 다만 어둑한 윤곽처럼 스쳐 간 모습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퇴근길 정류장, 유리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실루엣이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그 형체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멈춰 있었고, 나는 그 침묵의 속뜻을 읽어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버스가 다가올 때 들리던 낮은 진동과 길게 이어진 어두운 색조가 하강하는 조각의 움직임과 함께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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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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