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가 여는 다른 하루

- 글쓰기가 조금 망설여질 때 책상 앞에 앉는 법 -

by 정성균

프롤로그


하루의 방향이 전환되던 그 순간, 손끝이 움직였고 저녁노을이 방 안을 감쌌습니다. 어둠이 내리기 전, 책상 위에 펼쳐 둔 공책 한 장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만든 아주 작은 변화였으나, 이 떨림에 묻은 기운이 묘하게 길게 머물렀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낮 동안 흩어져 버린 단상들이 가만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는 꺼내지 못했던 기척들이 종이 위로 올라올 준비를 하는 듯했습니다.


펜을 들어 문장 한 줄을 적기까지는 언제나 짧은 틈이 필요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하루의 특정 부분이 나를 붙잡고 있었는지 찾는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책에서 배운 이론이나 글쓰기 규칙이 먼저 떠오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둑한 방 안의 공기, 불현듯 멈춘 호흡,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껴졌던 묵직한 감각 비슷한 것들이 먼저 손끝의 궤적을 결정했습니다.


글은 항상 말보다 느리게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이 느린 속도 덕분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눌려 있던 상념들이 고요히 올라왔고, 서둘러 넘겼던 감정의 표면도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글귀를 만들다 보면, 그날의 무게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차츰 드러났습니다. 흐트러진 하루를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아도, 글은 자연스레 형태를 갖추며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문장 한 줄로 충분했습니다. 종이에 적힌 짤막한 표현이 의외의 힘을 발휘해 마음속 지향점을 가볍게 바꾸는 체험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조정이었지만, 그 사소한 이동이 다음 날의 시야를 전환시키는 시점이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이따금 이러한 방식으로 다가왔습니다. 선명한 정답을 내미기보다는 차분히 눈을 다시 뜨게 만드는 일에 더 가까웠습니다.


저는 오랜 감각을 따라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 가르치려는 마음도 없었고, 글쓰기를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었습니다. 다만 손끝이 놀릴 때마다 스며들던 속도와 경로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마음이 어떠한 경로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그 이동이 하루를 어떻게 새로이 세우는지 관찰하고 싶었습니다.


이 기록은 이 여정을 따라 적은 것입니다. 작성법을 소개하지 않고, 글의 구조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이 하루를 거치며 문장을 통과하는 아주 짧은 머무름을 느릿하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종이를 넘기며 떠오른 묵은 기억,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의 무늬, 선택하지 않았던 길 뒤편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가능성 따위가 어떻게 글 속에서 새로운 위치를 찾는지 맥락을 담고 싶었습니다.


현재, 독자님은 한 페이지를 펼친 상태로 프롤로그를 읽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을 닫고 난 뒤 어떤 글을 떠올릴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독자님의 하루에도 말로는 설명되지 않던 구간이 하나쯤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손끝이 약간 움직인다면, 아주 작은 글 한 조각이 내일의 관점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잠재력을 믿으며, 본 글의 첫 장을 건네고 싶습니다.


글쓰기는 마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길로 펼쳐집니다


실내로 스며드는 빛의 경로가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살짝 달라지는 순간, 마음속에서 미묘한 신호가 은은하게 떠오릅니다. 손의 가장 얇은 지점이 펜을 들어 올리기 이전부터 어느 곳에서 물결이 형성되고, 그 변화가 글의 출발점이 됩니다. 글귀를 떠올리기도 전에 안쪽의 파동이 점차 방향을 잡기 시작하면서, 사고의 질서가 한 줄의 길을 향해 모여듭니다.


적어 내려가는 과정은 머릿속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일과는 별개의 결을 품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머물던 회상이 종이 위에서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 흩어져 있던 느낌도 문장 속에서 제위치를 찾습니다. 흐트러져 있던 생각은 글이라는 형식을 만나면서 고유의 흐름을 얻고, 그 진행을 지켜보는 동안 마음 내부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글은 개인의 시선을 점진적으로 모아주는 힘을 가집니다. 손끝에서 이어지는 문장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던 매듭을 조금씩 풀어내고, 떠돌던 생각도 특정 시점에 고요히 머무를 공간을 찾습니다. 그리하여 쌓인 한 줄은 잊혀 있던 질문을 부드럽게 끌어올리고, 쓰는 이에게 다시 바라볼 시점을 건네주곤 합니다.


어떤 저술은 완성된 뒤보다, 그 사이를 지나온 시간이 더 길게 남습니다. 생각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어졌는지 돌아보는 동안 글쓰기는 개인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다음 글귀를 향한 잔잔한 발걸음을 남깁니다.


글쓰기는 하루의 장면을 조용히 모아 갑니다


저녁의 기운이 실내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점, 하루의 끝자락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소음이 가라앉은 방 안에서 당일의 다양한 단면이 살포시 떠오르고, 주변의 공기가 안정되기 시작하면 맥락이 점점 형태를 갖춥니다. 사건의 차례를 되짚기보다, 하루가 무슨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는지 바라보게 되는 틈입니다. 기록은 흩어졌던 감촉을 하나의 줄기로 모으며, 그 속에서 하루의 윤곽이 차분히 정리됩니다.


노트 위에 문장이 놓이기 시작하면, 마음속 심층적인 영역에서 스쳐 지나간 미묘한 아주 짧게 머문 자락이 다른 얼굴로 다가옵니다. 억지로 끌어낸 회상이 아니라서인지, 자연스럽게 떠오른 정경일수록 글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표현됩니다. 그렇게 남겨진 한 줄은 그날의 분위기를 오래 붙잡고, 글 안에서 자신만의 구역을 찾습니다.


다음 날 이 텍스트를 재차 펼치면, 어제의 모습이 부드럽게 스며오듯 되살아나는 느낌이 이어집니다. 잠시 머물렀던 시간이 다시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하고, 어제의 줄기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늦은 밤에 적어둔 몇 줄은 그리하여 내일의 나에게 오늘을 건네는 창이 되고, 잊힐 것만 같던 하루의 자국을 평온하게 붙잡아 줍니다.


글쓰기는 생각의 실타래를 손끝에서 풀어냅니다


손의 가장 얇은 지점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들이 종이 위에서 경로를 찾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무게가 글 속으로 스며들며, 마음 한편이 차츰 풀리는 기분이 감돕니다.


이 흐름은 계산된 구조로 분류되는 과정과 별개로, 필기구 끝에서 전해지는 속도를 따라가는 데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엉켜 있던 실타래가 길게 이어진 글귀 안에서 개별적으로 풀려나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적는 행위는 생각을 억지로 다루려는 힘과 거리가 멀고, 안쪽에 머물던 압력을 순하게 흘려보내는 편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머물던 덩어리도 문장에 닿는 동안 상이한 모습을 띠며, 종이 위에서 한층 부드러워지는 기미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적어 내려갈 때, 손의 가장 여린 지점에서 번지는 움직임은 마음속 흐름을 한층 부드러운 자리로 이끌어 주곤 합니다. 글 사이에 남겨진 하나하나의 글줄은 잠시 머물렀던 단상의 흔적이 되어, 다음 페이지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발판처럼 느껴집니다.


글쓰기는 머물렀던 감각을 다시 불러옵니다


기억 속 심층부에 눌려 있던 느낌이 글을 쓰는 동안 서서히 떠오릅니다. 사건의 맥락보다 먼저 스쳐 지나간 특정한 공간의 흔적이 우선 반응하고, 한동안 머물렀던 장소의 공기나 지나가던 소리가 활자 사이에서 가만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잊힌 줄 알았던 느낌이 문장 속에서 다시 활성화될 때, 오래 머물러 있던 시간이 현재의 시점과 은밀하게 이어집니다.


문장을 바라보는 동안 촉감이 되살아나는 시점도 있습니다. 비가 내린 뒤의 흙냄새가 글 속 어딘가에서 은근히 떠오르는 듯 보이고, 걷던 길가에서 들리던 소리가 재차 귓가에 스며드는 찰나가 생깁니다. 떠올리려는 의도보다 손끝에서 이어지는 행위에 더 가깝게 반응하듯 감각이 되살아나고, 그 진행이 다음 글귀를 부릅니다.


적어 내려가는 일은 오랫동안 잠든 감각의 표면을 조용히 다시금 만지는 행동입니다. 기록은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모습을 현재의 조명 아래로 조금씩 끌어올리고, 그 만남이 사고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리합니다. 그리하여 글귀 하나를 지나오는 동안 마음 어딘가에 길게 머물러 있던 틈이 천천히 깨어나며 다른 이야기를 준비하게 됩니다.


글쓰기는 숨겨진 의미를 천천히 드러내 줍니다


너무 흐릿하거나, 때때로 지나치게 날카로워 한동안 외면했던 진의가 있습니다. 글을 적는 동안 이 조각들이 문장 사이에서 방향을 잡기 시작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가볍게 흔들리는 움직임이 표면 가까이 천천히 다가옵니다.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언어는 스스로의 속도를 지니고, 이 흐름에 맞춰 오래 머물러 있던 의미가 차분히 모습을 갖춥니다.


광선처럼 번지는 순간을 기대하기보다, 느린 여명을 바라보는 작업입니다. 흐린 기운이 걷히는 공간에 서 있으면, 말로 담기지 않던 생각들이 점진적으로 형태를 정비하며 다가옵니다. 침묵에 가까웠던 장소도 글귀와 마주하는 동안 새로운 활동을 얻고, 사이에서 오랫동안 남아 있던 의문이 경로를 틀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언어가 스스로 길을 열어가는 것과 같은 흐름을 만듭니다.


기록은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조각을 현재의 언어로 재구축하는 과업일 수 있습니다. 장시간 감춰져 있던 뜻이 문장을 따라 차츰 정리되고, 어둑한 영역에 머물던 사고도 종이 위에서 별도의 질서를 얻습니다. 글은 그렇게 느릿하게 쌓이고, 그 맥락을 바라보는 동안 쓰는 이는 자신의 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다음 문장의 지향점을 고요하게 결정합니다.


글쓰기는 사람의 시선을 다른 각도로 이끕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정성균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57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1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