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끊임없이 더 빠른 대답을 요구하지만, 정작 가장 먼저 응답해야 할 대상은 타인의 시선보다 조용히 흐르는 나 자신의 숨소리다.
언제부터인가 하루는 스스로의 결단이 아닌 외부 신호로부터 시작되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손바닥 위에서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들은 맑아야 할 새벽의 의식을 빠르게 잠식한다. 응답해야 한다는 강박은 스스로를 돌볼 권리를 가로채고, 삶의 주권은 타인의 속도에 헌납된 채 일상의 궤도로 등 떠밀려 나간다.
이 글은 거센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춰 서고자 하는 저항의 기록이다. 외부로 향했던 감각을 거두어들여 나만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는 일, 인지적 자율성을 되찾아 독자적인 박자로 생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고찰이다. 지금 이 순간, 무수한 화답의 감옥에서 벗어나 오직 존재함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을 마주하기를 바란다.
새벽은 변함없는 얼굴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 제자리에 놓인 가구들, 밤새 식어버린 방 안의 공기까지 풍경은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의식은 눈을 뜨는 과정조차 편안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유가 돌아오기도 전에 손은 머리맡을 더듬게 된다. 차가운 유리 화면이 손바닥에 닿는 느낌은 이제 신체의 일부처럼 익숙해졌다. 액정을 밝히는 짧은 틈에, 어둠을 밀어내고 쏟아지는 불빛은 조명을 대신하여 찾아온다. 외부에서 던지는 요구와 숙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불속에서 발을 내딛지도 않았다. 그런데 몸은 이미 일상의 흐름 속으로 던져진 듯 빠르게 반응하고 만다. 손가락이 매끄러운 표면을 훑고 지나가는 사이, 뇌는 정보들을 처리하느라 비명을 지른다.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의 잔상,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은 광고 문안, 타인의 생활이 담긴 사진들이 눈을 타고 들어온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찰나 기도는 낮아지고 가슴은 답답해진다. 일어나겠다는 의지보다 응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근육을 먼저 깨우는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기술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예전의 풍경은 연결되기 전 나 자신을 먼저 살피는 기회였다. 창문을 열어 고인 공기를 바꿔주거나, 물을 끓이며 육신을 서서히 깨우는 절차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개안과 접속이 동시에 일어난다. 형체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신경은 이미 타전되는 소식이나 평가 속에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마음의 속도가 일치하지 않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의욕이 고갈된 상태와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통제권을 신호에 내어준 채 시작하는 일과가 영혼의 밑바닥에 필연적으로 남기고 마는 쓸쓸한 흔적이다.
자기를 찾는 계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누군가 미리 그어놓은 타자의 길 위로 주체를 밀어 넣는다. 고요함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누구에게 화답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부호들뿐이다. 이러한 출발은 전체의 모양새를 결정한다. 주도하는 삶의 자리에 자극에 끌려가는 일상이 스며든 것이다.
소리 없는 소모다. 사고가 뚜렷해지기 전에 이미 기운을 다 써버린 조형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충분히 수면을 취했다고 믿지만, 실상은 밤새도록 다음 대화를 준비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기기를 내려놓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아도 휴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문에는 미지근한 온도가 남아 있고, 머릿속에는 처리할 과제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보폭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은 현대인을 괴롭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아파트라는 공간을 떠올려보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백 가구가 촘촘하게 맞붙어 산다. 위층의 발소리나 이웃집의 물소리에는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가슴 안쪽에서 들려오는 메마른 음성에는 무감각하다. 인구 밀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중심을 지키는 힘은 급격히 낮아졌다. 수직으로 쌓아 올린 콘크리트 상자 안에서 개인은 각자 기계의 광원에 의지해 이질적인 세계를 탐닉한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정서적 연대는 부재한 장소에서, 단말기가 제공하는 가상의 유대는 일시적인 안식처가 된다. 그러나 이는 서로의 시각을 공유하며 시간을 갉아먹는 행위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인지적 주권을 상실한다. 스스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정교하게 분류해 놓은 욕망을 대리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무심코 클릭한 뉴스, 손가락으로 가볍게 넘긴 데이터가 취향을 형성하는 것이라 믿는다면 착각이다. 누군가의 설계가 의식을 재편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느낄지조차 타인이 마련한 틀 안에서 결정되는 생을 주권자의 것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권리를 되찾는 일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잠시 접속을 끊고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강력한 저항에서 시작된다.
속도는 성실함이라는 가짜 면죄부를 주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정보를 섭취하고 즉각 반응하는 것을 유능함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쉼 없이 쏟아지는 자극에 대응하느라 소모되는 에너지는 정작 사유의 깊이를 만드는 데 쓰이지 못한다. 얕은 지식과 단편적인 소식들이 뇌를 가득 채울수록, 공허는 깊어진다. 좁은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화려할지 모르나, 그 안에서 홀로 빛나는 액정을 마주한 단독자의 시야는 파편화되어 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소음이 쏟아져 들어온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틈새에도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모습이다. 장치가 조용한데도 진동을 느낀 듯 움찔거리곤 한다. 감각이 너무 예민해져 있다는 증거다. 시공간을 에워싼 채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가고 있다. 답장을 빨리하는 것이 능력의 기준이 되고, 바로 화답하는 것이 예의가 된 풍토에서 머무름이나 비어 있는 지점은 부족함 혹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속도에 이토록 집착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늦어지면 무능하거나 성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빠른 반응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빼앗고, 설익은 판단을 내리게 만들 뿐이다. 경주하듯 살아가지만,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잊어버린 채 발걸음만 재촉하는 형국이다. 무조건 빨라야 한다는 강박은 인간의 존엄성을 도구로 전락시킨다.
점심시간의 풍경을 떠올려 보라. 식당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은 음식을 대하면서도 시선은 유리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입으로는 음식물을 씹고 있지만, 정신은 멀리 떨어진 타인의 소식이나 가상 세계의 소문에 가 있다.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액정 너머의 자극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기이한 상황이다. "요즘 바쁜가 봐?"라는 무심한 인사에 "바쁜 게 좋은 거지"라는 공허한 확신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속이고 만다. 힘든 상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기운이 없고, 말한다 해도 상대가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에서 나오는 태도다.
이러한 대화의 실종은 개인의 고립을 깊게 만든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편리한 도구가 되어가지만, 단어 뒤에 숨겨진 고통은 쉴 곳을 잃고 고여갈 뿐이다. 점점 더 많은 말을 전송하지만, 정작 마음을 나누는 순간은 줄어들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각자의 섬에 갇혀 신호를 보내듯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이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결속될수록 더 소외되는 역설에 직면한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 큰일이 없는 날에도 이토록 힘이 다 빠진 상태로 일터를 나서는 것일까? 느끼는 끈질긴 피로의 본질은 일의 양보다, 감내해야 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 횟수가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한다.
신경계는 오랜 시간 동안 눈앞의 물리적 위협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졌는데, 발달한 기술은 거리를 없앤 채 끊임없이 도전을 던지고 있다. 뇌는 온라인의 신호와 실제 현실의 위기를 완벽히 가려내지 못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뇌는 생존을 위해 모든 자극을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단지 메신저 알림 소리 하나에도 짐승을 마주한 듯 스트레스 물질을 내보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짜 반응들이 하루에 수백 번 반복되면 몸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성능 좋은 기계라도 수만 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돌리면 속도가 느려지고 뜨거워지다가 결국 멈추는 이치와 같다. 몸도 과부하에 들어서 있는 셈이다.
해결을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메시지에 즉각 화답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한다. 먼저 하루 중 단 3분만이라도 눈을 감고 숨과 인사해 보는 연습을 권하고 싶다. 코끝을 스치는 기류에 집중해 보자. 시원한 공기가 콧등을 지나 폐부 깊숙한 곳까지 가닿는 경로를 상상해 본다. 잠시 머물렀던 숨이 다시 따뜻한 열기를 머금고 입술 사이로 빠져나갈 때, 긴장도 함께 흩어진다.
들이마시고 내뱉는 순환이야말로 생명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권리다. 외부로 향했던 감각을 거두어들여 자신의 호흡이 만드는 리듬에 몸을 맡겨보자. 이는 뇌에 휴식 신호를 보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자, 타인에게 내주었던 주권을 다시 찾아오는 의식이다. 고르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도, 기대를 충족시킬 이유도 없다. 오직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어서 지금 여기의 느낌을 깨워보길 바란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무게감이나 발바닥이 바닥을 누르는 단단한 질감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의 고리를 끊고 실제 공간으로 돌아오는 훌륭한 훈련이 된다. 이를테면 걷는 동안 전해지는 땅의 촉감을 느껴보거나, 차를 마시는 동안 찻잔에서 올라오는 온도에만 집중해 보는 것도 좋다. 마지막으로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인정을 건네보라. "애썼다, 오늘 정말 고생했다"라고 소리 내어 말해주거나 마음으로 속삭여 주는 것만으로도 비로소 깊은 평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명상을 떠나,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소중한 싸움이다.
어둠이 깊어 다시 자리에 눕게 된다. 사방은 고요해졌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한낮의 소음들로 어지럽기만 하다. 보냈던 문장들이 적절했는지,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지는 않았는지, 내일은 어떤 고비가 기다릴지 다시 떠올려 본다. 과정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더 빨랐어야 했는데", "더 알차게 보냈어야 했는데" 같은 후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자신을 이토록 다그치는 배경에는 생산성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로 여기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비어 있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땅이 기름지기 위해 휴식기가 필요하듯, 마음도 여백이 있어야 새로운 생각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을 반응의 속도에서 머무름의 깊이로 옮겨야 할 때다.
명심하라. 타인의 만족을 위해 설계된 도구가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숨 쉬는 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벽한 생명이다. 겪고 있는 정체 모를 무력감은 결코 잘못이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세상이 촘촘하게 짜놓은 연결망 속에서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시도하는 안전장치라 보아야 한다. 의욕이 줄어들고 반응이 느려지는 현상은, 이제는 제발 멈춰달라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아픈 속을 좀 봐달라고 몸이 보내는 간절한 편지다.
작은 일에도 기쁨을 느끼고, 때로는 소음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도 건강하게 지속될 수 있을 테니까.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듯, 휴식과 일도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 한 줄에 하나의 의미만 담아야 명확한 글이 되듯이, 한 짧은 지점에서는 한 가지 감각에만 집중해 보라. 식사할 때는 풍미에만, 산책할 때는 움직임에만 집중하는 작은 시도가 대답의 감옥에서 풀어줄 것이다.
오늘의 마침표는 스스로 찍는 것이라 믿는다. 세상이 강제로 꺼버리는 불빛이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침내 평온하다고 선언하며 감는 두 눈을 통해 하루를 완성해 보길 바란다. 고요함 속에 시계 소리만이 남았을 때, 규칙적인 리듬이 심장 박동과 같이 느껴진다면 내일을 다시 살아갈 진정한 힘을 얻은 것이다. 오늘이, 그리고 다가올 내일이 타인의 속도가 아닌 자신만의 박자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스스로 찍은 마침표 끝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타인을 위한 대답보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고요한 숨소리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오늘 충분히 훌륭했다. 이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이 글이 홀로 머무는 시간을 지켜주는 든든한 문장이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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