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일정표에서 나를 지웠다. 펜이 그어놓은 선 위로 이름 붙지 않은 고요가 먼저 도착했다.
아침 눈을 뜨자마자 손목 위 워치가 짧고 날카로운 진동을 내뱉는다. 어두운 방 안,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푸른빛이 망막을 찌른다. 화면 속에는 어젯밤의 수면 점수와 산소포화도, 그리고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심박수 그래프가 픽셀 단위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손목을 파고드는 실리콘 밴드의 눅눅한 압박은 본체 뒷면의 센서가 나의 생체 신호를 단 1초도 놓치지 않고 훑어내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12월의 혹독한 미세먼지 수치를 알리는 빨간 점이 경고등처럼 깜빡이고, 그 아래로 처리해야 할 업무와 사람들의 이름이 푸른 알림 창 속에 빽빽하게 줄을 서 있다. 이 정교한 데이터 기록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 같으면서도, 나를 보이지 않는 사슬로 묶어두는 차가운 금속 굴레와 같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풍경을 수집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을 해왔다.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사유의 그물로 건져 올려 원고지 위에 나열하는 것이 일과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은 삶을 체험이 아닌 소재의 수집으로 전락시켰다. 수많은 단어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정작 내면은 이름 붙이지 못한 갈증으로 가득했다. 마감 전날까지 빈 화면만 바라보다 끝내 저장조차 하지 못한 원고 한 편이 여전히 노트북 폴더 속에서 미완의 제목으로 남아 있었다. 마음은 그릇과 같아서, 비워낸 빈자리만큼만 새로운 평온이 고일 수 있음을 체감한다. 그래서 오늘, 기록해야 할 문장들과 작가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오직 숨 쉬는 생명체로써의 나만을 남겨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현관문을 닫으며 습관처럼 쥐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는다. 지퍼를 닫는 순간, 손바닥을 점유하던 매끄러운 고릴라 글라스의 촉감이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온다. 동트기 전의 새벽빛이 아직 얼어붙은 길가에 채 마르지 않은 시간, 편의점의 차가운 LED 조명은 아침 햇살이 비치기 직전 가장 낮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이 도시의 아침은 서울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 셔터를 굳게 내린 상가들 사이로 가끔 지나가는 시내버스의 육중한 엔진 소리가 겨울의 정적을 찢어발긴다. 거리에는 쓰레기 수거차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축축한 얼룩과 젖은 아스팔트 특유의 비릿하고 서늘한 냄새가 공기 중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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