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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랑을 쥐려다 숨 막히게 하는가

by 정성균

사랑은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작고 귀한 생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본능을 끝내 참아내는 일이다. 언제든 날아와 머물 수 있는 나무가 되어주는 쪽에 더 가깝다. 아주 작은 아기 새 한 마리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솜털 같은 깃털이 손금 사이를 스치고, 좁쌀만 한 심장이 맥박과 맞닿아 미세하게 떤다. 그 생동하는 움직임이 애틋한 나머지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리게 된다.


그러나 힘을 주어 움켜쥐는 순간, 손 안의 산소는 순식간에 희박해진다. 어린 생명은 호흡이 가빠 펄떡이다가 결국 그 작고 예뻤던 고개를 떨군 채 움직임이 멎는다. 손을 펼쳤을 때 남는 것은 따스함 대신 차갑게 식어버린 슬픔뿐이다. 사람 사이의 이끌림 역시 비슷한 성질을 가진다. 타인을 내 세계 안에 억지로 묶어두려 할수록 상대는 답답함을 느껴 멀어지려 하고, 결국 관계의 맥박은 서서히 멈춰간다.


참된 아낌은 꽉 쥐는 힘보다는, 동반자가 자유롭게 노닐다가도 언제든 편안히 돌아올 수 있게 손바닥을 부드럽게 펴주는 용기에서 피어난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이 그 영혼인지, 혹은 상대를 잃을까 봐 겁에 질린 나 자신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점이다. 인연의 운명은 소유하려는 욕심보다 서로 사이의 틈을 다루는 부드러운 태도에서 결정되곤 한다.


정서적 안식처라는 확신


낮은 조도의 조명이 켜진 치유의 공간에서 곁에 있는 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조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나는 심리학자 존 볼비가 세운 '안전 기지'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는 가설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생존과 성장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진실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볕이 내리쬐는 오후의 놀이터 풍경을 상상해 보라.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보호자의 손을 놓고 미끄럼틀을 향해 뒤뚱거리며 달려간다. 아이는 다섯 걸음에 한 번씩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다. 벤치에 앉은 양육자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양육자가 따스하게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면, 아이는 비로소 안심하고 다시 미끄럼틀 계단을 기어오른다.


아이가 홀로 나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돌아가 안길 품이 저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다리에 힘을 실어주는 셈이다. 이 '든든한 거점'이 튼튼할수록 사람은 더 먼 곳까지 탐험할 의지를 얻게 된다. 진정한 결속은 곁에 묶어두는 밧줄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완성된다. 상대가 어느 숲을 거닐든,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굳건한 뒷모습이 되어주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나와 다른 궤도로 움직이는 존재로 대우할 때, 비로소 사이에는 숨 쉴 산소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서적 안식은 물리적 거리를 가깝게 유지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존재가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우리가 상대를 구속하려 드는 이유는 그 뿌리가 깊지 못하다는 불안 때문이다. 확신이 흔들릴수록 손은 더 단단히 잠긴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면 서로를 칭칭 감아올려 버틴다. 하지만 그렇게 뒤엉킨 나무들은 서로의 햇빛을 가리고 영양분을 빼앗으며 결국 함께 고사하고 만다. 건강한 숲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적당한 하늘길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내면의 빈 공간이 만든 초조의 몸짓


집착은 연정의 탈을 쓴 불안의 거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지탱할 기둥이 없는 정신은 타인을 지지대 삼아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려 들기 마련이다. 소식을 기다리며 밤새 휴대폰 화면만 노려보던 이들의 고백은 내밀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칠흑 같은 새벽 세 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방 안에서 오직 손바닥 위의 화면만 퍼런 빛을 뿜어낸다. 전용 앱을 켜서 숫자 '1'이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십 번 화면을 껐다 켜는 행동을 반복한다. 손가락 끝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가쁘게 뛴다. 그 순간 속을 가득 채운 것은 애정이 아니라,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지독한 두려움일 뿐이다.


상대의 작은 반응 하나에 자신의 가치를 거는 것만큼 위태로운 일은 없으리라. 집착은 타인을 아끼는 행위라기보다, 본인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상대라는 제물을 태워 안심을 얻으려는 비겁한 선택에 가깝다. 인연을 붙들려 애쓰지만, 정작 그 손아귀 안에서 소통은 가장 빠르게 숨이 막혀버린다. 이는 상대를 인격체가 아니라 괴로움을 달래줄 소품으로 여기게 될 위험을 담고 있다. 사랑은 쥐는 악력보다는 손바닥을 펴는 담대함 속에서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다.


우리는 집착을 열정의 다른 이름으로 오해하곤 한다. 누군가를 그토록 갈구하는 것이 깊은 사랑의 증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냉정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타자를 향한 응시가 아니라, 자기 안의 거대한 구멍을 들여다보는 행위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시간과 감정을 강제로 끌어다 쓰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 진정한 성숙은 내 안의 빈자리를 타인으로 채우려는 유혹을 견디고, 그 허전함을 스스로의 온도로 데우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비로소 타인을 소유물이 아닌 한 사람의 영혼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교묘한 휘두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조명이 낮게 깔린 내밀한 대화의 자리에서 이 문장은 다정한 위로가 아닌 서늘한 칼날로 돌아서곤 한다. 그 음절 사이에는 타인의 생을 본인의 설계도대로 수정하려는 지배 욕구가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보살핌과 책임이라는 가면을 쓴 통제는 그래서 더욱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상대가 입을 옷차림부터 만나는 지인의 목록, 심지어 내밀한 꿈의 형태까지 사랑이라는 구실로 제멋대로 재단하는 행동을 보일 때 관계의 균형은 무너진다. 상대의 독립적인 선택이 나의 내면을 흔들면, 금세 "나를 위한다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라며 죄책감을 자극하는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마음의 문턱을 넘어온 어느 삼십 대 남성은 점심 메뉴 하나를 고르면서도 타인의 눈을 먼저 살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보다, 어떻게 보일지가 먼저인 사람처럼 보였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이 그의 텅 빈 눈동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해지는 지조차 잊은 채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관계 속에서 오래도록 선택권을 내어준 결과였다. 균형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은 애정이 아니라 깊은 의존이었다. 이 장면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관계에서 반복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진정한 존중은 타인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나에게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함께 걷되 대신 걷지 않는 태도, 상대의 걸음이 나보다 느리거나 빠르더라도 그저 곁에서 속도를 맞추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 적당한 거리 위에서만 인간의 존엄은 숨을 쉰다. 사랑은 상대의 서툰 부분을 붙잡아 다듬는 권력이 아니다. 각자의 가능성이 스스로 자라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려주는 토양에 가깝다. 그런 자리에서만 관계는 숨 막히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이러한 통제 욕구는 흔히 '걱정'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 우리를 기만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걱정한다고 말할 때, 그 이면에는 상대가 내 통제권 밖으로 나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오만함이 숨어 있다. 하지만 타인이 실수를 하고, 길을 잃으며, 때로는 아파할 권리조차 우리가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 모든 방황이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고유한 무늬가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아낀다는 것은 그가 걷는 가시밭길을 대신 치워주는 일보다는, 그가 거친 길을 통과해 돌아왔을 때 말없이 상처를 닦아줄 준비를 하는 일에 가깝다. 타인의 자유를 견디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윤리의 지점이다.


오래된 사이를 살리는 간격의 미학


장기적인 결속이 무너지는 원인은 대개 지루함보다 여백의 상실에서 온다고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 자리에 지나친 밀착이 들어서면 소통은 서서히 산소 부족 상태에 빠져든다. 어제 본 얼굴을 오늘 또 본다는 익숙함은 상대를 다 안다는 오만을 낳기 십상이다. 대화는 짧아지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편하다는 이유로 거추장스러운 옷처럼 벗어던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침대 위에서 눈을 뜨는 오늘의 그는 어제의 그와 분명 다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매 순간 세포가 변하듯 인간의 심상도 결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오래된 사이일수록 더 정성스러운 설명과 의도적인 간극을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치 악보 위에서 쉼표가 있어야 소리가 비로소 음악이 되듯이, 인연에서도 '심리적 안전거리'가 확보되어야만 작은 돌발 상황에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맹목적인 믿음보다 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상대를 향한 성실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상대를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보지 않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인은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영토와 같다. 오늘 아침 그가 마신 커피의 온도, 그가 무심코 내뱉은 한숨의 무게,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맺힌 빛의 각도는 어제와 결코 같을 수 없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멈출 때 관계는 박제된 풍경화처럼 변한다.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상대를 다 아는 존재로 여기는 일보다는, 매일 아침 처음 만나는 낯선 여행자처럼 예우하는 데 있다. 그 낯섦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관계는 낡지 않고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이제 인연은 소유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존재라는 가벼운 날개를 달아야 할 때다. 상대를 내 곁에 두려는 억지스러운 노력을 멈추고, 상대가 나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인정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나를 선택해 주었을 때 느끼는 뭉클한 감동이야말로 사랑의 정수라 할 만하다. 집착의 손을 펴는 행위는 상대를 포기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와 상대 모두를 질식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어떤 관계는 아무리 조심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손을 펴고서도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꽉 쥐었던 손을 폈을 때, 아기 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오직 깃털 하나 남지 않은 빈손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빈손이야말로 한때 누군가를 온 힘을 다해 붙잡으려 했던, 그러나 끝내 타인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내 성장의 유일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사랑이 끝내 나를 구원하지 못할지라도, 그 거리를 견뎌낸 시간만큼은 내부에 고스란히 쌓여 나를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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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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