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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음으로 채우는 봄

- 도다리 쑥국이 건네는 회복의 처방전 -

by 정성균

겨울은 만물을 비워내게 합니다. 나무는 제 몸의 일부였던 잎을 아낌없이 떨구고, 대지는 생기를 안으로 품으며 긴 침묵에 듭니다. 차가운 고독의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것들만이 봄이라는 화사한 초대장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제 점심, 식단 위에 올랐던 도다리 쑥국을 떠올리며 생존의 끈질긴 힘과 그것이 체내로 들어와 일으키는 작은 변화를 살핍니다.


식탁 위 그릇에서는 뽀얀 김과 함께 비린내 대신 짙은 흙내음이 감돌았습니다.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이 어종을 두고 논란이 일곤 합니다. 산란을 막 마친 직후라 살의 고소함이 덜하고 푸석하다는 지적입니다. 학술적 관점에서 도다리(문치가자미)가 가장 통통 해지는 시기는 초여름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히려 그 '비어 있음'에 눈길이 머뭅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다시 활력을 채워가기 시작하는 치열한 복구의 과정에 마음이 끌립니다. 이 계절 음식을 찾는 행위는 완성된 맛을 즐기기보다, 이제 막 기운을 차려가는 존재의 정직한 허기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가깝습니다.


이 시기 도다리가 품은 성분 구성은 흥미롭습니다. 지방이 빠져나간 자리를 양질의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메우고 있습니다. 결합 조직을 튼튼하게 하는 콜라겐과 엘라스틴, 피로를 씻어내 주는 타우린이 풍부한 상태입니다. 자연은 오묘합니다. 가장 기운이 없을 때, 도다리는 역설적으로 타인을 가장 잘 회복시키는 보양식으로 거듭납니다. 편안한 소화를 돕고 시력을 보호하며 면역력을 높여주는 비타민 A와 B까지 넉넉히 품었으니, 겨우내 영양이 결핍된 우리를 위해 대지가 정성껏 조제한 처방전과 다름없습니다.


이와 짝을 이루는 쑥은 강인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길가나 척박한 들판에서도 기어이 고개를 내밉니다. 어제 국물 속에서 연하게 씹히던 초록빛 잎사귀는 얼어붙은 땅속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볕이 조금이라도 따스해지면 가장 먼저 깨어난 것들입니다. 향기가 강렬하여 굳어 있던 몸의 감각을 깨우는 신호로 다가옵니다.


둘의 만남은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바다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온몸으로 쓸며 고독을 견딘 생명과, 언 땅을 뚫고 나오기 위해 허리를 비틀던 육상의 식물이 냄비 안에서 교차합니다. 수중과 지상, 서로 다른 고통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한 모금의 국물 안에서 완벽하게 화해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따뜻한 성질을 가진 쑥이 도다리의 찬 기운을 보듬고, 칼슘과 비타민이 아미노산과 어우러져 기혈을 원활하게 합니다. 각자의 시련을 견디느라 거칠어진 존재들이 만나 결핍을 채워주는 풍경이야말로 진정한 봄의 모습이라 믿습니다.


반찬으로 나온 냉이와 달래도 살뜰히 챙깁니다. 냉이는 한자로 ‘나이(薺)’라고 쓰는데, 고대 시집인 "시경"에는 그 맛이 달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씁쓸함이 먼저 느껴지는 채소임에도 어째서 달다고 표현했을까요. 힘든 환경을 이겨낸 끝에 얻는 결실이 그만큼 달콤했기 때문일 겁니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서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높이 솟으려 하지 않고 지열에 기대어 버틴 낮은 자세가 스스로를 살렸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계절의 길목에서 가장 귀한 뿌리를 맛보는 호사를 누립니다.


달래는 '산속의 마늘'이라 불릴 만큼 알싸함이 특징입니다. 사찰에서는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고 하여 수행자들이 멀리했던 오신채의 매운 성질을 닮았습니다. 평범한 이들에게 이 자극은 축 처진 어깨를 세워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잠자고 있던 본능을 건드려 깨우는 그 맛은, 나태해진 정신을 일깨우는 매서운 회초리와 같습니다. 맵고 아린 기운이 혀끝을 지나갈 때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 식재료들과 닮았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겨울을 지납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할 때도 있고, 추운 세상의 시선에 움츠러들어 바짝 엎드려 지내야 하는 시절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몸을 추스르고, 흙 밑에서 숨을 죽이는 행위는 퇴보가 아닌 더 단단해지기 위한 예비 단계입니다.


자연을 관찰하며 얻는 위안은 '순환'에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속도로 흐릅니다. 쑥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고 해서 도다리가 서두르지 않으며, 냉이가 꽃을 피웠다고 해서 달래가 질투하는 법도 없습니다. 각자의 시계에 맞춰 인내의 시간을 통과할 뿐입니다. 타인의 보폭에 맞춰 자신의 봄을 억지로 끌어당기려 애쓰다 스스로를 소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살점이 푸석한 이유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헌신 뒤에 찾아오는 허기를 '맛없음'이 아닌 '경건함'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실패나 좌절 역시 누군가를 위해 혹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내준 우리만의 '산란기'일지도 모릅니다.


원고지 앞에서 문장이 풀리지 않아 밤을 지새울 때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힌 기분이 듭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어야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는 문구가 태어납니다. 쉽게 쓰인 글은 쉽게 잊히지만, 오랜 시간 고민하고 세공한 원고는 도다리 쑥국처럼 깊은 울림을 줍니다.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어휘를 고르는 행위는 뿌리를 내리는 쑥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식탁 위의 요리는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견디느라 애썼으니 이제 이 에너지를 받아 다시 시작해 보라는 격려입니다. 우리는 자연이 시련을 이겨낸 거룩한 시간을 통째로 복용합니다. 어제 점심, 국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허기뿐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했습니다. 겨울을 이겨낸 개체들의 활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덕분입니다.

봄은 화려한 꽃으로 기억되지만, 그 결실을 위해 대지 밑에서 치열한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쓴맛 뒤에 숨은 달콤함을 이해하고, 매운맛에서 살아가려는 의지를 읽어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연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며, 초목은 어김없이 솟아오릅니다. 우리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그만입니다.


창밖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으로 추운 계절을 버텼습니다. 정지된 풍경 같아도 내면은 누구보다 분주히 움직입니다. 줄기 구석구석에는 보이지 않는 분투의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기록을 맛과 영양으로 받아들일 때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됩니다.


소박한 식단이 가르쳐준 교훈은 '회복의 가치'입니다. 비워진 곳은 반드시 채워지기 마련이며, 낮게 엎드린 존재가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한다는 사실은 평범하면서도 위대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고 지치게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이미 그 겨울을 이겨낼 힘이 들어 있습니다. 향긋한 숨결을 들이마시며 숟가락을 드는 순간 내 안의 봄도 활짝 기지개를 켭니다.


버텨준 생명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들을 기꺼이 내어준 대지에게 감사합니다. 이제 배를 채웠으니 다시 펜을 잡을 시간입니다. 원고지 위에도 도다리 쑥국처럼 맑고 깊은 향기가 배어 나오기를, 읽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꽃 하나 피울 수 있는 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식으로 이 계절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아줄 여러분만의 봄은 어디쯤 와 있습니까. 어제 제가 느꼈던 그 따스한 위로를 여러분도 마주해 보시길 권합니다. 인내가 빚어낸 이 달고 매운 격려가 여러분의 식탁 위에도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길고 추운 겨울을 잘 견뎠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마주할 식탁은 충분히 호사스러울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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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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