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 제7화

인정 투쟁

by 조성현

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 제7화

(이 글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의료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의료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지는 않았지만 분명코 오월 시민군이었으며 동시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구한 히포크라테스의 후예였습니다. 당시 전남대 의대 인턴 - 현 광주시 소재 아동병원장 - 이었던 유용상 선생의 증언과 광주시의사회에서 편찬한 증언록 자료 및 5.18기념재단의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알립니다.) <계간 수필미학 연재>

<인정 투쟁>


우리 모두는 공동체에 소속된 자부심을 품고 긍정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 누군가의 가치가 인정되지 않을 때 인정 투쟁이 시작된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인정 투쟁은 당사자들의 명예뿐만 아니라 그 나라와 사회의 역사적 의미 정립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신군부 정권은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갔고, 광주 학살의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였다. 신군부의 단죄까지 긴 시간 동안 광주시민들의 마음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군사정권의 탄압에도 1982년부터 부상자, 유족과 학생들은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하였고, 전국 학생과 시민단체, 정치권에서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97년 대법원은 12.12와 5.18 주모자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확정하였다.

같은 해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 제정을 공포하였다. 2004년에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5.18민중항쟁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확인받았다.


또한, 2011년에는 5.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광주항쟁이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는 의료진들의 구체적인 기록 제출과 증언도 큰 몫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세력이 북한 공작설, 북한 특수부대 침투설 등으로 광주시민들의 마음에 난 상처를 덧내고 진실을 호도하며 5.18정신에 흠집을 내왔었다. 이에 대해 유용상 선생의 말을 들어보자.


“있을 수 없는 사태에 대해서 잘못했으면 ‘국가가 큰 문제를 일으켰다’라고 시인하면 되는데, 말하자면 폭도로 몰아버리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어요. 거기에 지만원 같은 자들이 계속 상처를 주고 있어요. 광주 사람들이 우리의 슬픔을 자기들한테 온전히 느껴주라고 요구하지도 않아요.


남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근데 남에게 상처를 주니까 당연히 우리는 인정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가 평화와 용서로 승화되기를 원하였지요.


그런데 그 상처를 계속 덧내며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이 일부 있을 거 아니에요. 인간 세상이기 때문에 이해타산이죠. 어떻게 보면 잇속이지요.”

2022년 5월 20일에 열린 5.18 의료인 활동 구술증언 행사도 인정 투쟁의 일환이다.

동학농민혁명도 당시에는 그 의미가 정리되지 못하였다. 물론 의병 전쟁과 독립군 전쟁이 동학혁명의 영향을 받았어도 의미 정립은 후세의 몫이었다.

도민 인구 10%인 삼만여 명이 희생된 제주4.3과 미군이 저지른 노근리민간인학살사건 등 해방 후 국가권력 및 외세가 저지른 많은 폭력은 오랫동안 부당한 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묻혀야만 했다.


당시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억압 속에서도 진상 조사와 인정 투쟁을 전개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있고, 국가로부터 피해 사실을 인정받아 명예가 회복되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그 당시는 알기 어렵다. 광주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넘어 세계의 민주화에 크나큰 본보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여러 사회적, 군사적, 지역적 탄압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지난한 인정 투쟁을 진행해왔다. 이제 우리나라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고, 독재에 시달리는 세계인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은 큰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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