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 가지를 기록한다. 누적 200km 통과, 전체 걸을 거리의 1/4 이상 돌파, 전라남도를 벗어나 전라북도에 진입. 도보여행 시작한 지 일주일째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오늘은 거의 정북 방향으로 걸었다. 며칠 만에 파아란 하늘을 보았다. 구름도 맑다. 저 건너 산등선에 아기 구름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얼마나 예쁜지 얼굴 전체를 보고팠는데 아기 구름은 수줍어서 저 멀리 산 뒤로 얼굴을 감춘다.
맑은 하늘에서 온갖 모양으로 멋을 낸 하이얀 구름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산과 잘 어울린다.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착한 성격은 우리 자연에 동화되었기 때문 아닐까?
오늘도 우치재와 다른 고개를 넘었다. 그리 높지 않아도 고갯길은 도보 여행자를 지치게 한다. 땅끝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내륙을 대각선으로 관통하기 때문에 산이 많아 매일 고개를 넘는다. 곧 익숙해질 것이다.
혼자 여행하며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밥 먹는 일이다. 식당에서는 나 홀로 손님이 달갑지 않다. 혼자나 둘이나 내오는 반찬은 마찬가지다. 식당 주인도 영업하는 사람이므로 이해는 간다. 손님이 주인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점심때 고추장 고을 순창을 지났다. 전라도 음식 맛을 으뜸으로 치지만 이곳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도시이므로 내심 기대가 컸다. 청국장찌개를 먹으려고 어느 식당을 점찍어 들어가면서 입구에 앉아 있는 여주인에게 식사 되냐고 물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주인은 나를 쭉 훑어보더니 밥 뜸 들이는 중이라서 안 된단다. 정오쯤인데 이런 이유는 맞지 않았다. 홀로 손님을 거절한 것이다.
옆 식당 간판을 보았다. 김치찌개는 2인분 이상이고 곰탕도 있었다. 옳다구나, 곰탕으로 정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곰탕은 준비가 안 되고 김치찌개는 1인분이 가능하단다. 잘 되었다 싶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김치찌개와 여섯 가지 반찬이 나왔다. 달걀 고명 아래 돼지고기가 일 인분치고는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허기가 진 상태라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먹다 보니 돼지고기와 찌개의 김치가 조금 이상했다. 주문하자 곧이어 음식이 나왔는데 고기는 퍽퍽하고 비계는 흐물거렸다. 김치도 아삭한 맛이 전혀 없었다. 찌개가 나오며 불 위에서 바로 끓기에 익었냐 물었더니 젊은 주인은 고기는 익었는데 풋고추는 더 익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당에 들어설 때 얼핏 본 다른 테이블 광경이 떠올랐다. 식사를 마치고 치우지 않은 테이블에 먹다 만 김치찌개 냄비가 두어 개 있었고 그 안에는 돼지고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때 ‘고기를 많이 남겼군. 아깝다’라고 속으로 말한 기억이 났다.
주문하자 바로 나온 것도 이상했고, 고기는 익었는데 풋고추가 익지 않았다는 주인의 말도 이상했다. 재탕 같아 보였지만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잠시 먹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밥을 먹지 못하면 저녁까지 식당 찾기가 쉽지 않다. 남이 먹다 남은 것이면 어떠랴, 센 불에 충분히 가열했으니 위생에 문제는 없다. 무엇보다 나는 체력 보충을 위해 고기를 먹어야 했다.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난 모르는 거야. 나는 김치찌개로 밥을 먹는 거야’라며. 생각을 바꾸자 돼지고기가 먹을 만했다. 아니, 맛이 있었다. 밥을 한 그릇 더 주문했다. 2인분은 됨직한 찌개를 비웠다. 셈을 치르며 주인장에게 아주 잘 먹었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오늘의 이모저모
내가 걸은 2차선 도로 옆으로 4차선 도로가 나란히 달렸다. 4차선 도로는 거리가 짧고 고갯길도 없어서 힘이 들 땐 유혹을 받는다. 오늘 그랬다. 그러나 4차선 도로에서는 자동차 소음과 흙먼지를 피할 수 없고, 도무지 아스팔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2차선 도로는 다르다. 걷다 보면 새소리를 자주 듣는다. 참새가 근처에서 날아다니며 지저귄다. 어제는 길가 숲에서 노니는 장끼를 보았다. 길 가다 뒤를 돌아보고 옆을 보며 ‘아! 참 아름답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마을이 폭 안겨있다. 농촌 삶의 현장인 논과 밭 옆을 지나면 싹이 나고 자라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생명의 환희다. 무엇보다 마실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며 웃음을 나눌 수 있다. 이러니 한순간의 4차선 유혹은 이내 사라진다.
오늘 섬진강 다리를 건넜다. 새로 놓은 강진교 옆 낡은 다리를 건너며 서쪽 섬진강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수풀과 휘어지는 물길을 가운데 두고 500여 미터의 좌 회문산, 우 필봉산이 양옆으로 강을 호위한다. 그 너머로는 여러 산자락이 겹겹이 걸쳐 있다. 절경이다. 작년 도보여행 때 담양에서 섬진강 상류를 만났다. 이 강을 따라 내려가면 구례를 만나고 하동을 만난다.
내일은 임실 관촌면까지 26km 걸을 예정이다. 이젠 30km가 안 되면 가볍게 생각하게 되었다. 오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