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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Jul 19. 2023

루이 15세의 바이올리니스트

장-마리 르클레르와 18세기 바이올린 음악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장-마리 르클레르 <바이올린 소나타 3권 op.5>

연주자: 아드리안 버터필드(바이올린), 사라 맥마혼(첼로), 실라스 볼스톤(하프시코드)

레이블: 낙소스 NAXOS




앞서 소개한 <혁명 전 파리 살롱의 여흥> 글에서 자크 뒤플리의 음악을 통해 루이 15-16세 시대의 클라브생 음악을 감상했다면, 오늘은 같은 시대 바이올린 소나타를 대표하는 장-마리 르클레르(Jean-Marie Leclaire, 1697-1764)의 음악을 소개하려 한다. 르클레르는 형제들도 모두 음악가였고 동명의 동생이 있기에 'the elder'로 구분해 부른다. 르클레르는 프랑스 '바이올린 소나타' 양식을 완성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소나타 형식의 완결성뿐만 아니라 매끄럽고 우아한 연주 스타일로 ‘프랑스 바이올린 악파’의 창시자라고 불릴 만큼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큰 예술가이다. 그는 총 49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남겼고 이 음악은 18세기 프랑스 바이올린 음악의 선구적 작품이자 그 시대 취향의 절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곡들은 모두 세련된 하모니의 사랑스러운 감흥을 가지고 있으며, 18세기에 유행한 전원 취미를 담은 ’ 갈랑트‘ 스타일로 당시 상류사회의 음악 취향을 대변한다.


전통적으로 오페라, 발레, 종교음악이 주를 이루었던 프랑스에서는 18세기 초부터 소규모의 기악음악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악보 인쇄업이 발달하고 저작권을 통해 음악가들이 돈을 벌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등 다양한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 모음집' 창작이 급증했고, 교양으로써 악기 교습이 권장되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악보 출판 산업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음악 취향을 제정하고 통제했던 루이 14세 시대 이후, 오를레앙공의 섭정 시기와 루이 15-16세 시대에는 다양한 취향과 국적의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 그 취향을 주도한 그룹은 파리의 상류 귀족과 부르주아들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 음악과 비교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거장 아르칸젤로 코렐리(Archangelo Corelli, 1653-1713)는 바이올린 소나타 양식을 정립하고 바이올린 음악의 유행을 이끈 인물인데 그의 악보는 로마, 파리, 런던, 안트베르펜, 암스테르담 등 유럽 각 도시에서 출판되며 인기를 끌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은  바이올린이 가진 독주악기로서의 매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루이 15세의 딸 중의 한 명인 마리 아델라이데가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그 인기가 더 높아졌다. 또한 이 브런치 글 중에 <프랑스 로코코 바이올린의 매력>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바이올리니스트 미켈레 마시티(Michele Mascitti, 1664-1706)처럼 파리로 이주한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이미 코렐리의 바이올린 예술을 잘 알고 있었고 이탈리아 음악을 프랑스에 소개하며 두 나라의 음악 취향을 뒤섞기 시작했다. 그 흐름의 중심에 있던 음악가가 바로 장-마리 르클레르였다.


<마담 라 콩테스의 살롱 음악회>, 1774 - engraved by Duclos after Saint Aubin


기악곡과 같은 소규모 앙상블은 베르사이유를 벗어나 파리로 오면서 지식인들의 살롱 문화를 타고 더 활발히 연주되었다. 살롱은 부유한 예술 후원자들이 집에서 주최하는 사적인 모임이었는데 이러한 친밀한 환경은 바이올리니스트를 포함한 음악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선보이고 실내악을 연주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바이올린은 종종 실내악 앙상블, 기악 소나타, 모음곡 등에서 눈에 띄게 등장하며 음악 전체를 주도하는 악기로 부상했다. 르클레르의 49곡이 담긴 바이올린 소나타집 4권(1723-1743)은 이런 역사적 문맥에서 탄생했다.


르클레르는 격정적이고 선율미가 뛰어난 이탈리아 양식을 리드미컬하고 우아한 프랑스 양식과 섞었는데, 그 결과 노래하는듯한 선율미와 기교적 연출이 돋보이는 '갈랑트' 양식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탄생했다. 르클레르 소나타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바이올린의 테크닉을 최대한 활용한 것. 기교적인 빠른 패시지, 더블 스토핑(double stopping, 바이올린 등 현악기에서, 두 현 또는 그 이상의 현의 음을 동시에 긁어 소리를 내는 주법), 음역의 확장 등을 통해 독주악기로서 바이올린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천부적인 멜로디 감각으로 감성적인 악상을 친숙하게 드러내는데 각 소나타의 몇몇 아리아(aria) 악장이 그 백미이다. 게다가 르클레르는 바이올린과 그 반주를 맡은 악기와의 대화를 중요시했다. 주선율은 바이올린이 주도하지만 두 파트가 세련된 하모니를 이루는 방식은 음악적 밀도를 높이고 풍요로운 감정을 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특히 바이올린이 '대화를 하는 듯'한 아티큘레이션과 선율 표현은 '갈랑트' 스타일의 사랑스러운 밀어, 멜랑콜리한 감성의 정겨움을 담고 있어 매우 '프랑스적'으로 다가온다.


니콜라 레피시에, <아폴로, 예술의 수호자 루이 15세>, 1772

르클레르는 1725년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시작된 공공 음악회 '르 콩세르 스피리튀엘'(Le Concert Spirituel)에 출연하며 자신의 뛰어난 기교와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르 콩세르 스피리튀엘'은 왕실 극장이 문을 닫는 부활절과 오순절 휴일 기간에 열린 대중 음악회로 종교합창곡과 연주자의 기교를 자랑할 수 있는 기악곡으로 주로 구성되었다. 낮은 신분의 귀족, 상류 부르주아, 외국인들이 주관람객층이었는데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연간 정기 프로그램으로까지 확대되어 대혁명 전까지 개최되었다. 이 공공 연주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로 대중적 명성을 얻은 르클레르는 1733년 베르사이유의 왕실 연주자(Ordinaire de la Musique de Roi)로 지명되는데 이 직위는 루이 15세가 직접 지명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왕실에서 르클레르가 활동했던 앙상블은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측근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고 주로 연회, 무도회, 궁전의 사교모임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의 사적인 장소에서도 음악을 연주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후원자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고, 왕실 연주자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베르사이유에서 음악은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연출되고 다듬어졌던 왕의 일상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예술적 수단이었다. 음악이 곁들여진 의례들은 날마다, 달마다 반복되었고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에 의해 조직되고, 왕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진흥되었다.  


르클레르는 자신을 궁정 악사로 임명한 루이 15세에게 <바이올린 소나타 3집 op.5>의 12곡을 헌정했다. 루이 15세는 오페라 감상 등 취미 활동에도 열심이었고, 정치/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왕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음악과 예술의 수호신이자 태양의 신인 아폴로에 비유되었다. 예술을 후원하는 태양신으로서의 프랑스 군주상은 '왕권신수설'의 전통에서 왕가의 명맥을 타고 이어온 상징이었다. 르클레르와 동시대에 활동한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ucher, 1703-1770)가 그린 <일출>(1752), <일몰>(1752)에서 루이 15세는 태양의 신 아폴로로 등장하며 하루의 시간을 표현한다. 일출 장면에서 아폴로는 푸른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일몰 장면에서는 어둠이 진 땅으로 내려와 그를 반기는 님프 테티스로 그려진 애첩 퐁파두르 부인과 조우한다. 루이 15세는 태양이고 또 음악을 관장하는 신이자 전지전능한 왕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퐁파두르 부인이 부셰에게 직접 의뢰한 그림으로 루이 15세와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 간의 사랑과 우정을 아폴로와 테티스의 신화에 빗대어 표현한 걸작이다.


하늘거리며 공기처럼 가벼운 옷자락의 묘사, 구름과 물의 소용돌이치는 듯한 구불거리는 선, 상승과 하강의 기운을 전달하는 역동적인 구도, 나체의 살결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시촉각적 감각, 공기의 흐름을 묘사하는 부드러운 붓질은 마치 그 당시 음악의 사랑스러운 선율과 화려한 장식음을 연상시키듯 리듬과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르클레르, 부셰, 퐁파두르 부인은 모두 동시대 프랑스 로코코 예술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으며 '갈랑트'라는 시대의 흥청거리는 취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음악의 목표는 단순했다. 매력적(charm)이고 즐거우면(delight) 충분했다. 매끄럽고 화사한 음향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파스텔톤 벽지와 황금 장식으로 치장된 살롱에서 연주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그런 감각적 감흥이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유행하고 있었고 르클레르의 소나타는 그 취향과 정확히 공명한다.  


프랑수아 부셰 <일출>(왼쪽), <일몰>(오른쪽), 캔버스에 유채, 1752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1악장은 악상의 음영과 컬러를 미묘하게 조절하는 바이올린 음색 그리고 흥겹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나아가는 진행이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고, 우아한 춤곡의 알레그로 악장으로 이어지며 매우 '프랑스적'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반면 소나타 2번은 이탈리아적인데 젠틀하면서도 다이내믹한 음영이 돋보이며 2악장의 활력은 얼핏 비발디의 활력을 닮아있다. 소나타 3번의 '아리아' 악장은 노래하는 듯한 바이올린의 아티큘레이션이 마치 연극의 워딩처럼 들리는데, 소나타 7번 3악장의 '아다지오' 또는 소나타 8번 2악장 '아리아'의 감미로운 선율도 마찬가지다. 르클레르의 모든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장식음은 선율을 꾸며주고 의미를 명확하게 하지만 마치 대화하듯이, 말하듯이, 생각에 잠긴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듯이 흘러나오는 선율과 장식음은 단순히 어떤 악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듯이 들린다. 그런 표현이 매우 다소곳하고 사랑스럽게 등장하는데 르클레르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이런 아티큘레이션의 특성을 명확한 발음과 풍부한 감성으로 표현해야 한다. 소나타 9번 1악장 안단테 악장은 풍부한 표정과 매끄럽게 흘러가는 선율이 우아한 대화를 연상시키고 바이올린의 노래와 호흡을 맞추는 클라브생의 화음이 조화롭다. 10번 4악장은 포크 스타일로 시골풍의 흥겨운 춤곡을 닮았는데 당시의 전원 취미를 반영한 듯이 보인다. <바이올린 소나타 제3권>의 마지막 12번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은 느리지만 경쾌한 춤곡 '샤콘느'이다. 바이올린의 리드미컬한 기교가 다소곳이 펼쳐지며 전체 세트를 차분하게 마무리한다.


르클레르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네덜란드 궁정에서도 활동했으며, 파리에서는 왕실뿐만 아니라 그라몽 공작(Antoine-Antonin de Gramon)의 극장에서 일하면서 상류층을 상대로 당대의 취향을 이끌어간 음악가였다. 그는 각 나라의 음악에 정통했고 왕실과 귀족의 사설 극장 모두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바이올린 소나타에 외에도 그는 협주곡 등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는데 그중의 걸작이 또 <두 대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1730, 1747-49)이다. 개인적으로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수 없다. 한참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 빠져있을 때 중고 음반점에서 무심코 주워온 LP였는데 바이올린 두 대가 마치 춤을 추듯 서로 얽히고 돌아가며 그리는 선율의 상쾌한 즐거움이 매우 충격적이어서 앉은자리에서 음반을 다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순수하게 '기쁨'을 위한 음악이었다. 루이 14세 이래로 발레와 춤곡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 음악의 전통과 로코코적 여흥이 완전하게 결합된 작품. 바로크 시대 프랑스인의 기질을 바이올린으로 가장 잘 옮겨놓은 예술가가 장-마리 르클레르라고 말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KYoOVSoL1Q



https://www.youtube.com/watch?v=IAIvL_zg7l8



https://www.youtube.com/watch?v=yTow9dmG5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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