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 2권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J.S.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모음곡 1권 & 2권>
연주자: 글렌 굴드
레이블: 컬럼비아-소니클래식
우리가 흔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S.Bach, 1685~1750)는 음악을 공부하는 그의 자식들과 학생들을 위한 건반악기 연습곡을 다수 남겼다. <클라비어 연습곡집 Keyboard Practice 총 4권>(1726-1741), <오르간 소곡집 Little Organ Book>(1708-1717), <인벤션과 신포니아 Invertions & Sinfonias>(1723) 등이 있고 <인벤션과 신포니아>는 지금도 피아노 배우는 학생들의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을만큼 대중적이다. 그리고 서양음악사에 길이 빛나는 걸작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The Well-Tempered Clavier>(1권 1722년, 2권 1742년)이 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애초에 교육용으로 창작되었지만 그 수준이 단순히 교본을 넘어 독자적인 음악성을 갖춘 걸작이자 바흐가 남긴 위대한 예술의 하나로 칭송받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함께 소개하는 음반은 20세기 중반 바흐 해석의 혁신을 일으키며 바흐 연주의 영원한 아이콘이 된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의 1963년 녹음이다.
바흐는 <평균율 클라비어 모음곡 1권>(1722)을 작곡하고 20년 뒤 <평균율 클라비어 모음곡 2권>(1742)을 작곡했다. 제목에 있는 '클라비어 clavier'라는 용어는, 피아노가 발명되기 전, 17~18세기에 사용되던 여러 건반악기(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버지널 등)를 통칭하는 단어이다. 서양음악사에서 이 작품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양음악의 모든 장단조 조성 24개(C, c, C♯, c♯, D, d, E♭, e♭(d♯), E, e, F, f, F♯, f♯, G, g, A♭, g♯, A, a, B♭, b♭, B, b)를 탐구하고 곡을 붙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권에는 모두 24곡이 담겨있는데 한 곡은 '전주곡과 푸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총 48곡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한 권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1권의 첫 시작은 C장조의 전주곡과 푸가, 다음은 C단조의 전주곡과 푸가, 이어서 C샵 장조의 전주곡과 푸가, 마지막으로 C샵 단조의 전주곡과 푸가 이런 순서로 D, E, F, G, A, B의 장단조 조성을 모두 훑고 끝을 맺는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도 동일하게 구성되었으므로 총 96곡이 1~2권에 담겨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양 음악의 모든 조성을 탐구했기에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Hans von Bülow, 1830~1894)는 이 작품을 "음악의 구약성서"라 일컬었다(신약성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그만큼 서양 음악이론의 탄탄한 근본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다.
또한 바흐는 '전주곡과 푸가'가 결합된 1세트의 악장 형식을 시도했고 이런 형식은 후대의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며 보편적인 악장 형식이 된다. 전주곡은 자유로운 악상 전개와 서정적인 감성이 특징이고, 푸가는 2~5 성부까지 여러 개의 성부(voices)가 돌림노래처럼 서로 어우러져 진행하는 형식으로 구성되는데, 각 성부가 서로 엉키지 않고 화음을 이룰 수 있도록 조합하는 작곡 기술이 필요한 곡으로 바흐는 이 '푸가'라는 다성음악 장르의 전형을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바흐가 완성한 다성음악 형식의 중요성은 음악 교육과 연주 현장에서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런데 바흐는 왜 각 음을 으뜸으로 하는 장단조의 96곡을 창작했을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중요할까? 평균율이라는 용어는 무엇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음악의 하모니, 자연과 우주의 하모니
평균율(平均律)의 '율'은 음률을 뜻하는 것이데 음률은 음높이의 상대적 관계를 규정한 것, 음정 체계와 이에 따른 악기의 조율 방식을 말한다. 상대적 규정이기 때문에 문명별로, 민족별로 다른 음률이 존재하며 서양에서도 고대 이래로 피타고라스 체계, 순정률, 중간온음률, 가온음률, 평균율 등 다양한 음률이 존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중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사용되고 있는 음률은 평균율이다.
14세기 무렵 본격적인 다성음악이 등장하고 16세기말부터 여러 악기와 목소리로 연주하는 화성 체계가 발달하면서 음높이의 비율에 따른 정확한 화음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음률을 쓸 것인지, 악기를 어떤 기준으로 조율해 서로 맞출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평균율은 17세기초에 등장해 18세기 이후로 가장 보편적인 유일무이한 음정체계가 되었다. 평균율은 12음을 옥타브로 삼는 조율 체계인데 각 음 사이 거리, 이를 테면 도와 도♯의 거리를 12√2:1의 비율을 두고 동일하게 등분해 한 옥타브를 음정 구성의 기초로 삼는다. 피아노의 흑백 건반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시 사이 백건 7개, 흑건 5개로 구성되고 이 12음이 평균율의 체계를 이룬다. 이 음률은 다른 체계보다도 한 곡 내에서의 조바꿈과 조옮김에 용이하며, 건반악기의 경우 조율을 변경하지 않고 모든 조의 음악의 연주가 가능해 다성음악의 발달과 함께 가장 일반적인 체계로 굳어졌다. 하나의 조성으로 한 곡을 끝내기보다는 여러 조성의 혼합, 이를 테면 순수한 느낌의 C장조와 절망적 느낌의 F단조를 결합하면 더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조바꿈과 조옮김이 유리한 평균율의 사용은 음악사에서 필연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순정률 등 다른 음률은 한 곡에서 한 조성 밖에는 연주할 수 없어 건반악기로 여러 조성의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고, 여러 성부를 조합해 화음을 만드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등장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건반악기에서 반음계의 모든 장조와 단조를 활용하기 위해 평균율을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는 18세기 전반에 유행했고 바흐와 동시대 음악인들도 학술적 논쟁을 진행하며 실제 작곡에 시도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평균율이 바흐 시대에 보편적으로 확정된 음률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도 순정률, 중간온음률 등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바흐는 24개 조성의 세계를 균질하게 녹여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통해 서양음악의 으뜸 체계가 될 수 있는 평균율 체계의 보편화를 위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평균율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있는 사상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한다. 서양 음률에 대한 여러 이론과 논쟁이 고대 이래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음률에 따른 조화로운 하모니는 자연(=우주)의 하모니를 반영한다는 '음악적 우주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 이래로 우주의 진리를 음악과 수비학으로 사고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음악과 수학은 곧 우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학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고 불리는, 인문교양으로 번역되는 7개의 학문에는 음악이 여타 과학과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법, 수사학, 논리학은 3학(Trivium),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은 4학(Quadrivium)이라 불리웠는데 음악이 4학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음악 이론이 수학적 표현을 통해 천구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화음의 비례는 수를 사용해 도와 높은 도의 옥타브 화음(1:2), 도와 솔인 5도 화음(3:2)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피타고라스가 현의 길이를 가감하며 얻은 듣기 좋은 화음(협화음)을 내는 비례였다. 쉽게 말하면 10cm의 줄을 5cm의 줄과 함께 튕기면 옥타브 화음을 이루고, 6cm 줄을 4cm 줄과 튕기면 5도 화음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음악의 하모니는 자연 현상의 아름다움, 우주의 조화를 나타내는 현상으로 이해되었고 이런 조화는 숫자와 비례를 통해 표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위의 1:2, 3:2와 같은 협화음의 비례식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숫자이자 음악과 우주의 하모니를 나타내는 숫자로 여겨졌다. 수비학 뿐만 아니라 기하학도 우주의 조화를 이해하는 학문으로 다뤄졌다. 플라톤은 세계 창조에 관한 저서 <티마이오스 Timaeus>(c. 기원전 360)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5개의 다면체를 제시하는데, 플라톤은 이 다면체를 붉, 흙, 물, 공기, 에테르와 연결시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로 설명했다.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의 수비학-기하학 이론은 고대 이래로 자연을 해석하는 기본 이론으로 17세기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ess Kepler, 1571~1630)의 태양계 연구와도 이어지며 서양 우주론(cosmology)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음악과 우주에 대한 알레고리를 표현한 그림이 하나 있다. 17세기 프랑스 화가 로랑 드 라 이흐(Laurent de La Hyre, 1606~1656)는 <음악의 알레고리 Allegory of Music>(1649)라는 작품을 남겼다. 그림 속 여인은 음악이 의인화된 뮤즈로 음률과 화음에 대한 은유로서 바로크 시대의 현악기 테오르보(theorbo)를 조율하고 있다. 배경에는 고대 신전의 기둥과 파이프 오르간의 파이프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플러팅(fluting)이라 불리는 기둥의 움푹 파인 홈 패턴의 규칙적 배열과 파이프의 일정한 배열이 시각적 리듬 패턴을 보여준다. 여인의 뒤에 앉아있는 나이팅게일은 자연(우주)의 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음악을 나타내는 탁자 위의 기물(류트, 바이올린, 2개의 리코더, 성악 악보, 류트 악보)과 대비되어 자연의 음악과 이론에 기반한 인간의 음악을 대조적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이 그림은 루이 14세를 섬기는 고위 행정가였던 제데옹 탈망(Gédéon Tallemant, 1613~1668)의 파리 저택에 장식된 7가지 교양과목의 표현 중 음악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창작되었다.
케플러의 제3법칙 - 조화의 법칙
음악적 하모니에 지배되는 우주라는 개념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연구에서부터 케플러의 저서 <우주의 하모니 Harmonice Mundi>(1619)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오래된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케플러는 천체 운동과 하모니에 대해 1) 기하학적인 해석, 2) 수리학적인 해석을 시도했는데 그의 저서 <우주의 신비 Mysterium Cosmographicum>(1596)에서 행성 궤도들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기 위해 다면체 모델을 응용한다. 우주에 대한 신의 기하학적 계획은 이미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제시한 오래된 개념이었다. 케플러는 플라톤이 언급한 우주 구성의 기본 형태인 다섯 개의 '플라톤 다면체'(정8면체, 정20면체, 정12면체, 정4면체, 정6면체)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이루는 원형의 궤도 안에 외접하고 내접하며 기하학적 형상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을 이룬다는 '케플러 제1법칙'이 나오기 전에 유럽인들은, 케플러를 포함해, 우주는 항상 완전한 구 형태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행성도 원형 궤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케플러 역시 이에 대한 믿음으로 플라톤의 다면체를 원형 궤도라는 가설과 조화시키려 했지만 원형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다면체 모델은 구 형태의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기에 태양계 행성의 타원 궤도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플라톤 다면체가 보여주는 수학적 법칙에 기반해 구성된 자연과 우주라는 개념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즉, 우주가 조화로운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조화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케플러의 제3법칙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와 상통한다.
플라톤 다면체를 적용한 위의 케플러의 천구 모형이 보여주듯이, 우주 공간의 기하학적 이해는 14~16세기 사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다성음악의 하모니와도 비유될 수 있다. 케플러의 행성 다면체는 다성음악의음악적 공간을 기하학적 공간과 유비해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선원근법처럼 기하학적 공간 속에서 입체적 공간이 탄생하듯이, 다성음악 역시 화성의 구축을 통해 음악적 공간을 입체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피에르 프랑카스텔(Pierre Francastel, 1900-1970)은 그의 명저 <미술과 사회 Peinture et Société>(1952)에서 수학적으로 작도된 르네상스 원근법적 공간이 14세기 다성음악의 발달과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했다. 안타깝게도 프랑카스텔은 여기서 더 이상 연구를 발전시키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을 케플러의 천구 모형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음악의 공간 확장은 음향적인 것만이 아니라 조형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여러 악기가 이루는 화음이 중첩되면서 부피가 커지고 소리가 풍부해지며 동시에 음향공간의 경험은 확대된다. 특히 푸가 양식처럼 여러 성부의 노래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작곡기법은 공간을 구획하는 건축 기법에 비견할만하다. 그래서 서양음악은 음을 수직적으로 결합시키는 화성 중심의 음악이고 서양 건축은 돌을 쌓아올리는 기술이며 미술은, 적어도 르네상스 이후, 원근법적 환영의 공간이다. 음악은 음의 비례에 따른 화음으로 기하-건축 공간을 구축하고 그 화음은 우리의 정신과 맞닿아 신의 뜻인 우주의 질서를 소리를 통해 드러내게 된다. 케플러는 저서 <우주의 하모니>에서 다성음악과 우주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성부로 노래하는 이 방식이 창조주를 본 딴 인간에 의해 고안된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여러 목소리로 구성된 인공적인 심포니를 통해, 우주가 지속되어 온 영원한 시간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연주해 낸다.
기하학적 분석과 더불어 태양계에 대한 케플러의 수리적 분석은 행성의 배열을 일종의 음계로 환원하여 생각한 개념이다. 지구에서 황도(태양이 1년에 걸쳐 움직이는 경로)까지 우주 전체가 한 옥타브를 이루고 그 안에 행성들이 음계처럼 배열되어 있다는 생각은 화음이 수학적 비율을 이루듯 천구가 특정한 비율에 따라 회전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케플러는 <우주의 하모니>에서 천체 운동이 일정한 규칙과 비율을 가지고 일정하게 공전하는 것을 '우주의 하모니'라고 칭했는데, 그 비율의 산출방식과 데이터는 굉장히 방대해 여기서 다 서술할 수는 없지만 행성 운동에서 음악적 비례를 추출해 내는 방식의 한 예는 들어볼 수 있다. 그는 인접한 행성 사이의 하모니를 발견하기 위해 각 행성의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점(근일점) 대비 가장 먼 점(원일점)의 비율을 조합해 행성들 사이에서 10개의 비율을 찾아냈다. 그 일부를 써보면 수성-금성은 2옥타브(4:1), 금성과 지구는 장6도(5:3), 화성과 목성은 3옥타브 (3:1), 목성과 토성은 1옥타브(2:1)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실제로 천체가 움직이며 내는 이런 화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케플러는 행성간의 수학적 비율이 곧 '정신적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신의 뜻이 이루어진 완전한 우주를 인간의 정신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사상에 기대고 있지만, 그와 함께 과학적 관찰도 덧붙여졌다는 점에서 과학혁명 태동기 서양인들의 혼재된 사고방식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조화로운 우주에 대한 수학적 표현은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을 계승하며 '음악적 하모니에 지배되는 우주'라는 개념을 더욱 강화시켰다.
바흐의 평균율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서양인들은 다성음악의 조화로운 연주에 가장 적합한 음률, 음정체계를 찾으려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평균율을 고안해냈다. 18세기 다성음악 연주에서 평균율이 가능케한 12개 음의 자유로운 조바꿈과 조옮김, 다채로운 음악적 표현은 그 자체로 12개의 음이 행성 간의 운동처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충분히 유비해 볼 수 있다. 따라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타고라스-케플러식으로 생각하면 자연애 내재한 하모니의 요소 12개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조화를 탐구한 걸작인 것이다.
그중 첫 곡인 평균율 제1권 <C장조의 전주곡 1번>은 대중매체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평균율 96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단순성에 깃든 서정적 무드, 아르페지오 위에 감미로운 선율을 살짝 추가함으로써 심플하게 아름다움을 얻어내는 바흐의 감성이 돋보인다. 균일한 톤, 페달을 사용하지 않는 레가토(부드럽게 이어치기), 일정한 리듬적 박동, 조화로운 표현, 바흐 특유의 내면적 평정심이 이 단순한 곡에 모두 담겨 있어 <평균율> 연주의 가장 쉽고 아름다운 곡으로 손꼽힌다. <E장조 전주곡 9번>은 느리고 서정적인 주제가 밝은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빠르게 달려가는 푸가로 변덕스럽게 돌변하는데, 이런 급박한 분위기는 다음곡인 <10번 전주곡>에서 어두운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다. 마치 조성의 변화에 따라 감정의 진동을 묘사하려는 듯 감정의 다채로운 팔레트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다. <12번 F단조 푸가> 도입부의 하강 음계는 매우 불길한데 그 기운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화음을 통해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2권의 <15번 G장조 푸가>는 약동하는 리드과 활력넘치는 트릴이 밝은 아침과 같이 화사한 푸가이다. <5번 D장조 전주곡>은 마치 트럼펫과 드럼 비트를 연상시키듯 피아노가 바로크 시대의 환희의 팡파르를 묘사하는 듯하다. 이어지는 푸가는 보다 차분해진 어조로 마치 트럼펫과 드럼이 종소리로 바뀐 듯한 관조적 울림을 드러낸다.
그 외 수많은 곡들을 다 집어낼 수는 없지만 아마도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듣는 이유는 장단조를 넘나드는 다양한 감정과 표현, 그리고 푸가의 질서 잡힌 형식이 주는 지적인 즐거움일 것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 절정과 해소가 명확한 고전낭만파 음악보다는 감정적 동요가 덜한 상태에서 상당한 기쁨과 슬픔을 맛보게 해 준다. 감정에 스며들어간 바흐가 가진 내면적 평화 감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 한 예로 19세기초 멘델스존이 연주하는 바흐의 '푸가'를 자주 들었던 괴테는 바흐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짤막한 메모를 남겼다.
내 마음의 완전한 상태. 외부의 방해로부터 자유롭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나는 젊은 거장의 연주로 부터 진실한 인상을 얻었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창세기 직전에 신의 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영원한 하모니가 음악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고.
글렌 굴드와 바흐 연주
마지막으로 연주자 글렌 굴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굴드는 평생 바흐 연주에 몰두했으며 그가 남긴 바흐 레코딩은 바흐 연주의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연주는 1950~60년대 당시 굉장히 충격적인 연주로 받아들여졌는데 18세기 클라비어를 위해 작곡된 곡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연주했기 때문이다. 1800년 이전까지의 악보는 오늘날의 악보와는 많이 달랐다. 바흐는 템포와 음악적 지시를 악보에 거의 남기지 않았다. 19세기 이후의 악보에는 작곡가가 세밀하게 모든 지시를 기호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바로크 시대 악보는 세밀한 표기보다는 당시의 해석 관행에 많이 의존했고 음악기호도 현대와 같은 표기라해도 그 의미가 오늘날과는 달랐다. 또 즉흥적인 연주도 많아 악보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니콜라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 1929~2016)가 주장한 대로,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17-18세기의 연주 관행을 연구하며 악보를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악보 그대로를 현대적인 해석 문맥에서 연주하면 이상한 음악이 되는데, 특히 울림과 모든 음을 부드럽게 이어 쳐가며 선율을 만들어가는 현대 피아노 방식을 바흐에 갖다 붙이면 마치 지나치게 설탕을 많이 탄 것처럼 감정 과잉의 달콤한 음악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바흐의 음악이 아니다. 아르농쿠르가 강조하듯이, 바흐를 비롯해 바로크 음악을 연주할 때는 그 시대 '음악의 문법'을 알아야 하고 그 문법에 따라 음을 연결하고 끊고 강세를 두며 '말하듯이' 발음해야 한다. 낭만주의 음악이 악상을 '그림처럼 그리는' 음악이었다면 바로크 음악은 '언어처럼 말을 하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은 회화적 감성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음표가 말하는 억양과 아티큘레이션을 중시한 음악이었다. 그런데 현대 피아노는 하프시코드에 비해서는 소리가 회화적으로 감미롭게 들린다. 게다가 페달까지 사용한다면 바흐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화려한 울림의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글렌 굴드는 모던 피아노로 바흐를 어떻게 최대한 바로크 시대에 가깝게 칠 수 있는지 연구했는데, 음의 발음 즉 아티큘레이션을 하는 데 있어 거의 스타카토에 가까운, 그러나 스타카토는 아닌 방식으로 음 하나하나를 때리는 듯이 치고 강세를 달리하며 억양에 변화를 주는 연주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그의 바흐 연주는 모든 음이 마치 통통 튀는 것처럼 살아 들리는데 모든 음의 음가가 살아있고 모든 성부의 노래를 살려야 하는 푸가에서는 모든 성부의 노래와 흐름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사라진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이자 음악 교육자인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1787)는 바로크 음악의 개별 음에 대한 아티큘레이션에 대해 다음과 언급했다.
...... 그러한 음표는 강하게 쳐야 하고, 강조되는 곳 없이 서서히 자신을 상실해 가면서 고요 속으로 길게 지속되어야 한다. 종의 울림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하프시코드 연주자를 제외하고, 굴드는 바흐 연주에서 위의 효과를 가장 잘 드러낸 피아니스트였다.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현대 피아노를 이런 방식으로 치는 연주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페달과 레가토(부드럽게 이어치기)를 듬뿍 쓰면서 낭만파 피아노곡처럼 서정적으로 연주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이런 현대적 감성의 방식도 우리가 바흐를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수많은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악상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주로 유명한 <평균율> 레코딩은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Richter, 1915~1977)의 음반이다. 그것은 매우 몽환적이고 아름답지만 원전에 충실하려는 음악가의 입장에서는 오류로 가득한 해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굴드가 모던 피아노로 연주한 이상 그의 연주가 바흐의 원전에 충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려면 하프시코드로 연주했어야 하지만 굴드의 위대한 점은 모던 피아노의 표현적 장점을 살리되 18세기에 살았던 바흐의 아티큘레이션을 독창적으로 재현해 냈다는 점이다. 페달을 밟지 않고 스타카토에 가까운 터치로 모든 음의 음가를 살리되 강약 조절, 연결과 끊기, 적당한 울림을 지속시키며 최대한 바흐가 의도한 방식으로 재현한 것. 종소리의 여운처럼 잔향을 활용해 음악을 입체적으로 조립하는 것.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들으며 소리가 대단히 단단하고 건조하면서도 각 음의 자연스런 잔향을 활용해 공간감, 입체감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런 연주는 피아노의 음을 물화시켜 음악 현상을 물리 현상으로 바꾸는 듯한 유물론적 해석으로 들린다. 낭만적 관점에서는 아름답지 않게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흐의 여러 성부를 해부하고 재현하기에는 굴드의 방식만큼 설득력 있는 연주법도 없다. 모든 음이 또렷이 살아있고 또 종소리처럼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역사성을 가진 동시에 생동감 넘치는 새로운 주법으로 독창적인 바흐 연주의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글렌 굴드는 영원한 바흐 연주의 아이콘이라는 것. 그가 연주하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비롯한 바흐의 건반악기 레코딩은 그래서, 마치 외계인처럼, 별세계에서 온 듯한 희귀한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VRQBUS6V7I
https://www.youtube.com/watch?v=pjnKuhcfB6U
https://www.youtube.com/watch?v=dgUnUd9oB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