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텐 Mar 29. 2023

아르카디아의 목동과 님프

18세기 프랑스 오페라와 전원문학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 라모, 퐁파두르 부인의 극장에서 - <아스트레의 귀환>, <시바리 사람들>  

연주자 : 앙상블 레 쉬프리즈(오케스트라), 루이 노엘 베스티옹 드 캉불라(지휘) 등  

레이블 : 알파



 

음반 <라모, 퐁파두르 부인의 극장에서>는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18세기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장-필리프-라모에게 의뢰한 오페라-발레 두 작품을 담고 있다. <아스트레의 귀환(1747)>과 <시바리 사람들(1753)>이 그것이다. 오페라-발레는 프랑스에서 발달한 음악극 양식으로 발레의 전통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오페라와 발레가 혼합된 화려한 양식의 무대를 즐겼다. 음반의 프랑스어 제목에 'Chez'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보통 '~의 집에서'라는 장소의 의미를 갖는다. 이 음악의 후원자였던 퐁파두르 부인의 저택, 혹은 이 오페라가 상연된 그녀의 극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작품의 창작 배경으로 보아 극장이라는 뜻에 더 가까워 보인다. 라모의 음악과 그의 후원자이자 로코코 예술의 아이콘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에 주목하면 18세기 프랑스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1747년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이유궁 내부 루이 15세의 처소 가까이에 15인 규모의 소극장 '테아트르 데 프티 캬비네 Théâtre des petits cabinets'를 열고 왕의 여가를 위한 연극, 오페라, 발레를 기획했다. 몰리에르의 코미디, 륄리의 오페라 등이 무대에 올려졌고 노래와 춤에 능했던 퐁파두르 부인은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배우들 뺨치는 뛰어난 연기로 왕의 칭찬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연기 장면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아래 그림은 1749년 2월 10일 베르사이유궁의 이동식 무대에 올려진 륄리의 파스토랄 오페라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공연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무대 위 갈라테아를 연기하고 있는 여배우가 바로 퐁파두르 부인이다. 오페라의 주인공역을 맡은 것으로 보아 노래 실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Charles-Nicolas (the Younger) Cochin, Marquise de Pompadour in a Scene from "Acis et Galatée", 1749,


그녀에게 극장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배우를 고르고, 공연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취미를 넘어선 그녀의 정치적 수단이었는데, 여흥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 15세를 극장에 초대해 만족할 만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또 자신의 노래 재능을 자랑하며 왕의 환심을 사는 행위는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접근해 궁정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왕의 애첩 자리는 항상 불안정하고 질시와 견제를 피할 수 없는 힘든 자리였다. '테아트르 데 프티 캬비네' 극장은 남성 중심 사회였던 베르사이유궁에서 퐁파두르 부인 스스로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왕의 여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스스로의 총명함으로 왕의 비서 역할도 수행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747년 퐁파두르 부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료로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1748)을 기념하기 위해 라모에게 오페라-발레 <사랑의 놀라움 Les Suprises de l'Amour>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1748년 11월 27일, 퐁파두르 부인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라모는 혁신적인 작풍으로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을 새롭게 개혁하며 논란의 중심에 선 음악가였지만 퐁파두르 부인은 그의 새로운 음악을 알아보고 적극 옹호한 후원자였다. 무엇이 새로운 음악인가? 라모 오페라의 신선함은 '중용'을 중요시한 태양왕 시대의 오페라 양식(음악가 륄리로 대표되는 양식)에서 탈피하고,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자연스러운 선율미를 적극 반영해 감정적 파토스로 드라마와 음악을 합치시켰다. 또한 <화성론>을 저술한 이론가답게 라모는 과감한 화성을 통해 표현적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우아한 '갈랑트' 스타일의 프랑스적 전통도 빼놓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혼합인 셈인데 전통 규범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지만 혁신이란 항상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은가? 들어보면 륄리의 아리아와 서창이 단조롭고 낭독조라면, 라모의 선율은 더 노래하듯 들린다. 아리아 <더 이상 불안은 없어라 Il n'est plus d'alarms>, <부드러운 사랑 Tendre Amour>의 자연스럽지만 감정이 실린 노래나, 아리아 <이 작업을 중지, 중단하시오 Arrêtez, suspendez ces travaux>의 불길한 화음을 통해 어두운 분위기를 환기하는 기술이 그 새로운 면모를 잘 들려주고 있다.  


오페라 <사랑의 놀라움>은 프롤로그와 2막으로 구성된 작품이었고 이 음반에 실린 <아스트레의 귀환>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사랑의 놀라움>은 초연 이후 <아스트레의 귀환> 부분이 삭제되고 새로운 막이 추가되어 오늘날 연주되는 작품은 오리지널과는 다른 판본이다. 음반을 녹음한 앙상블 '레 쉬프리즈'는 <아스트레의 귀환> 부분을 되살려 오리지널 판본대로 연주했으며 이 곡에 관한 세계 최초의 레코딩을 남겼다. <아스트레의 귀환>의 줄거리는 아테네 여신이 님프 아스트레로 하여금 영웅 아스트레아를 찾아오라는 임무를 맡기는데, 님프는 목동 셀라동과 함께 모험의 여정을 떠나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임무를 완수하고 목동 셀라동과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내용이다.


이런 류의 줄거리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전원문학' 양식을 그대로 따른다. 고대 그리스 혹은 '아르카디아' 같은 이상향을 배경으로 님프와 목동이 등장하고 복잡한 연애놀음 속에서 시련을 헤쳐나가며 사랑의 결실을 거둔다는 내용은 그 당시 유행하던 목가극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또한 신화적 내용을 통해 영웅적 호연지기, 사랑의 덕목을 숭상하는 상류층의 정신 문화와도 맞았다. 전원문학은 당시 사교계에서 올바른 품행을 가르치는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귀족들은 전원극을 직접 연기하며 즐겼고 연극무대는 환상과 욕망의 놀이터가 되었다. 궁정에서는 가면무도회가 열리고, 귀족의 저택에서는 목동 옷을 입고 시골 풍경을 그려넣은 무대에서 '우아한 연회'같은 사랑놀음이 무대에 올려졌다. 연극은 이상향으로의 도피, 복잡한 현실 정치의 스트레스에서 탈피하려는 상류층의 환상을 대리만족 시켜줬는데 전원극은 이탈리아에서 온 '코메디아 델 라르테' 희극과 함께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큰 인기를 끈 무대극이었다.   


프랑수아 부셰 <양치기 소년과 소녀> 1761


프랑수아 부셰 <여름의 목가>, 1749


전원극과 목가의 유행을 타고 로코코의 상징 같은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도 목동이 등장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장-앙투안느 와토가 <피에르 질>과 같은 '코메디아 델 라르테'의 장면을 그렸듯이, 부셰는 전원극의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부셰의 그림 속 목동들은 실제 노동계층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귀족들이 목동으로 변장해 "자연으로 돌아가세"라고 노래하며 연기하는 무대 위의 가식적 연회일 뿐이었다. 사실 당시 상류층의 삶 자체가 연극이고 극장이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 정해진 예법과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양식화된 삶. 그것이 베르사이유와 상류층의 피곤한 삶이었다. 목동이라는 가면은 예법에서 탈출해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놀이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상류층 삶은 가면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프랑스에서 연극이나 오페라가 가진 사회적 함의는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림의 배경 역시 전원극의 무대 디자인을 그대로 모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수아 부셰는 화가로 성공하기 전 무대미술 장식가로서 그의 커리어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대 미술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았고 퐁파두르 부인의 극장에서도 여러 작품의 디자인을 맡았다. 그리고 그가 디자인한 무대 배경을 자신의 목동 그림 속에 반영하곤 했다. 위 두 점의 그림 배경은 시골이 아니라 무대 위의 장면인 것이다.


그런데 목가적 전원에 대한 열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서양문화에서는 목가(Pastoral)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의 테오크리토스의 시집 <목가 Idyll>,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 Eclogues>에서 찾는다. 하지만 전원문학이라는 것은 도시가 생기고 복잡한 사회구조가 생겨난 이후 항상 그 반대 급부로서 생겨난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낭만적 감상을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굳이 테오크리토스나 베르길리우스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원시의 정신은 '도시의 발전'과 함께, 청풍명월의 바람과 함께 항상 우리와 함께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 유행한 '목가적인 것'은 좀 더 구체적인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캉탱 드 라 투르,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 1748-55


위의 모리스 캉텡 드 라 투르(Maurice-Quentin de La Tour)가 그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는 부인의 지적인 면모가 매우 잘 드러난 그림이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책과 지구본이 놓여있고, 의자 뒤에는 악기가 있으며 퐁파두르 부인은 악보를 손에 들고 있다. 이 모든 지물들이 그녀가 상당한 교양인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책상 위의 4권의 책 중 맨 왼쪽에 꽂혀있는 책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조반니 과리니(Giovanni Guarini, 1538-1612)가 쓴 희극 <충실한 목동 Il Pastor Fido>(1590)이다. 보통 책은 인물의 지적 취향과 시대의 사상을 알려주는 지물인데 초상화에 이 책을 의도적으로 그려 넣을 정도면 퐁파두르 부인이 과리니의 작품즐겼고 그 시절 파리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충실한 목동>은 이상향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님프, 양치기 등 등장인물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구애를 거절하는 등 갖가지 복잡한 연애관계가 진행되다가 결국엔 조화의 결실을 맺는 과정을 표현한 로맨스 작품이다. 발간 이후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전원극 장르의 모범이자 이정표와 같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헨델은 이 작품을 동명의 오페라로 작곡하기도 했다. 라모의 <아스트레의 귀환>을 비롯해 이 시대 전원극은 대게 목동의 사랑놀음을 그린 과리니의 작품과 유사한 플롯을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충실한 목동>의 삽화. 연애놀음 답게 사랑의 큐피드가 보인다. 배경의 '로마의 폐허'와 같은 도상은 18세기 프랑스 전원극의 배경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과리니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오노레 뒤르페(Honoré d’Urfé)라는 프랑스 작가는 전원소설 <아스트레 Astrée>(1607)를 발표한다. 라모의 <아스트레의 귀환>에 나오는 그 '아스트레'는 여기서 기원한 것이다. 이 소설 역시 시골을 배경으로 목동 셀라동과 목녀 아스트레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고 현실 도피적 판타지 내용이 프랑스 내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연인의 축제를 즐기던 사교계에서 로맨스의 예법과 같은 지침서로 통하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놀음은 말 그대로 우아한 연회,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였다. 그래서 비너스의 섬 시테르는 그 시대 프랑스 연인들의 이상향이 되었고, 화가 와토는 <시테르 섬으로 순례(1717)> 속에 연인들의 우아한 몸짓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러니 로코코 미술의 정점을 찍었던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에서 '전원 속의 목동 연인'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달콤한 분위기를 타고 그려진 것은 시대적 트렌드였던 것이다. 목가시, 전원문학의 영향력은 18세기에 지속적이었고 사랑을 통해 조화와 용서의 이상을 꿈꿨다. 그래서 라모의 <아스트레의 귀환>은 다음과 같은 아리아로 끝을 맺는다.


평화의 기쁨이 사랑의 제국으로 커져 갑니다. 사랑은 고집 센 변덕을 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죠. 모두의 간절한 열망을 위해 오늘은 근심하지 말아요. 사랑이 지속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전원극의 사랑 타령과 유사하게 유혹과 사랑의 소동을 다룬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1784)>은 다음과 같이 사랑과 용서의 노래 부르며 끝을 맺는다. 전원 문학의 전통과 로코코 사랑 문화가 18세기 서로 다른 작곡가의 이상을 한 데 묶은 셈이다. 라모와 모차르트. 파리와 비엔나. 참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다.


아! 이렇게 행복할지어다. 고통과 변덕과 광기의 이 날, 오직 사랑만이 만족과 기쁨으로 끝맺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 친구, 춤, 놀이, 불꽃에 불을 붙이기 위해! 모두 즐거운 행진 소리에 맞춰 축하를 위해 달려갑니다.



결국엔 모두 사랑타령 뿐이다. 이 음반에 <아스트레의 귀환>과 함께 실린 <시바리 사람들>은 루이 15세의 연례적 행사인 퐁텐블로 궁전 방문을 위해 퐁파두르 부인이 1753년에 라모에게 주문한 단막 오페라이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두 도시 시바리와 크로토네의 다툼을 다룬 작품이다. 시바리인들은 사랑으로 충만한 목가적 삶을 누리고, 크로토네인들은 호전적인 사람들로 평화의 시바리인들을 침략한다. 그러나 시바리 여왕의 노래 '부드러운 사랑, 당신의 무기를 빌려주세요 Tendre Amour, prête-moi tes armes'에서 보여주듯이, 결국엔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조화로운 평화 속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이렇듯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발레, 문학, 연극, 그림 이 모든 것은 아르카디아 같은 사랑 속으로, 사랑의 보드라운 공기 속으로, 사랑의 찬가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새털같이 가벼운 사랑, 로코코 예술의 달콤함 속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RJBaPJI-LX0




https://www.youtube.com/watch?v=-nwpP5ny9Q4&list=OLAK5uy_m5CDAalXJxEa4uROoLHAuJ5AI6-sNLf1c

이전 03화 사랑과 슬픔의 콩세르(concert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