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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텐 Sep 25. 2023

바흐의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 요한 크리스찬 바흐


바로크 클래식 음악 


음반명: 비르투오시티와 우아 :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연주자: 귀도 발레스트라치, 파올로 코르시, 스테파니 우이옹

레이블: 아르카나 Arcana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이하 J.S 바흐, 1685~1750)는 많은 자식을 두었고 그들 중 몇 명은 아버지와 같은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바흐 가문은 17세기 초부터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 활동하며 많은 음악가를 배출했는데 그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말할 필요도 없이 J.S. 바흐이고 그 윗세대로는 조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삼촌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 삼촌 요한 미하엘 바흐(1648~1694)도 훌륭한 음악가로 활동했다. J.S. 바흐의 자식들도 아버지에게 직접 음악 교육을 받고 음악가가 되었는데 장남인 빌렘 프리드리히 바흐(W.F 바흐), 3남인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이하 C.P.E 바흐), 11남인 요한 크리스찬 바흐(이하 J.C. 바흐)가 유명하다. 이 셋 중에서 베를린 궁정에서 활동한 C.P.E 바흐(1714~1788)와 런던에서 활동해 '런던의 바흐'라고 불리던 J.C. 바흐(1735~1782)가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고 오늘날의 바로크 음악 연주회에서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이 둘은 17-18세기 바로크 음악과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고전파 음악을 잇는 시기에 활동하며 바로크 음악의 낡은 언어에서 벗어나 고전파의 새로운 음악 언어를 탐구하는 참신한 예술을 추구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들의 음악은 이 전시기 갈랑트 양식의 고상함에서 벗어나 19세기 고전- 낭만파의 자유로운 감정 표현 방식에 가깝게 가려는 그런 음악이다.


이 음반은 C.P.E 바흐와 J.C.바흐의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를 담은 음반으로 바흐의 두 아들이 구사한 서로 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비교한다. 이 당시에는 건반악기 반주가 곁들여진 소나타가 유행이었는데 건반악기가 단지 반주의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표현을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으로 평가되었다. 음반의 제목은 <기교와 우아 Virtuocity and Grace>인데 형인 C.P.E 바흐의 음악을 기교적이라고 표현했고, 동생 J.C.바흐의 음악을 우아함이라고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서양음악사에서는 아버지 바흐가 사망한 1750년을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음악의 분기점으로 보고 하이든이 등장하기 전까지를 전 고전기라고 부르는데, 바흐의 두 아들은 이 시대의 예술의 급격한 변화를, 음악의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다. 형의 기교적인 음악은 과격한 표현까지 소화하는 미래 음악적인 성향, 동생의 우아한 소나타는 귀족적  갈랑트 양식의 과거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어 그 차이점을 즐기는 것이 이 음반을 감상하는 재미다.



C.P.E. 바흐는 교향곡의 초기 양식인 '신포니아(sinfonia)', 여러 편의 근대적인 협주곡과 소나타를 남겼고 무엇보다도 건반악기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쓴 <올바른 건반악기 연주를 위한 개론서>(1753)는 악기 연주가 교양의 필수 자질이라고 생각되던 18세기에 쳄발로, 클라비아 등의 건반악기 교본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도 음악을 배우기 시작할 때 교본을 통해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 궁정의 건반악기 연주자로 채용되어 오랜 기간 활동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대왕'으로 불린 계몽군주이자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였고 플룻 연주를 즐긴 아마추어 연주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C.P.E 바흐가 연주하는 장면을 그린 위의 유명한 그림은 19세기 독일의 화가 아돌프 폰 멘첼(Adolf von Menzel, 1815~1905)이 그린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1852)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역사화를 많이 남긴 화가 멘첼이 왕의 플루트 연주회를 상상하며 그린 그림인데 샹들리에 촛불의 은은한 조명 효과, 빛과 인물과 배경이 섞여 들어가는 듯한 붓질이 매우 인상적이다. 보면대를 앞에 두고 플루트를 연주하는 왕과 그 오른편에서 등을 돌리고 쳄발로를 연주하는 사람이 C.P.E 바흐이다.


C.P.E 바흐의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는 절제되고 우아한 형식의 음악과는 다르게 역동적이다. 동일한 감정을 표현하더라고 표현의 영역이 넓어졌고 극적 표현도 서슴지 않는데 1746년에 작곡한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D장조 Wq 137>의 2악장 '알레그로 몰토'(아래 동영상 참조)를 들어보면 빠르게 음계를 오르내리는 화려한 악절과 강약의 극적인 대비가 활력 넘치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이는 확실히 전 시대의 품위 있는 갈랑트 스타일보다는 변덕스럽고 과감하며 기교적이다. 언뜻 하이든의 걸작 <첼로 협주곡 D장조>를 떠올릴 만큼 참신한 표현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연주자에게 최상의 기교를 요구하는 활기찬 보잉과 빠르게 프렛을 움직이는 핑거링은 흥겨운 음악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반면에 1759년에 작곡된 G단조 소나타의 2악장 라르게토는 한숨 쉬는 동기와 지속적인 불협화음으로 표현되는 감정의 깊이가 놀라워 거의 낭만주의 음악의 단초를 듣는 듯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6oQn8TlmZk

C.P.E. 바흐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D장조 Wq 137> 2악장


'런던의 바흐' 요한 크리스티안은 독일을 떠나 밀라노에서 활동하다가 1762년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는 헨델이 활동했던 '킹스 씨어터'(King’s Theatre)에서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18세기 중엽의 런던은 유럽 최대의 도시였고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이 음악 산업에 투자되어 연주회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대중 콘서트홀이 서고 흥행업자들이 해외에서 스타 작곡가와 연주자를 섭외하고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려 티켓을 팔았다. 이 브런치의 글 <런던의 헨델>, <런던의 하이든>에서도 썼듯이, 대표적으로 헨델과 하이든은 18세기 런던의 음악계가 보유한 자본을 통해 런던 청중들에게 소개된 대가들이었다. 요한 크리스찬 바흐 역시 런던의 자본이 끌어들인 재능 있는 독일 음악가였다. 그는 독일에서 온 비올라 다 감바의 명장 칼 프리드리히 아벨(Carl Friedrich Abe, 1723~1787)과 손잡고 <바흐-아벨 콘서트>를 1764년에 시작해 본인들의 음악과 여타 음악가들의 작품을 런던의 '플레져 가든 Pleasure Garden'을 비롯한 여러 콘서트 무대에 올렸다. 아벨의 비올라 다 감바 연주는 매우 밝고 감미로운 선율의 대중성이 강한 스타일로 한 세대 전의 바로크 음악과는 다른, 보다 다소곳한 미감의 곡을 많이 남겼는데 비올라 다 감바의 인기가 사그라들던 시기에 마지막 바로크 거장으로 추앙받던 연주자였다.


게인즈버러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초상>(1776) (좌) / <프리드리히 아벨의 초상>(1765) (우)

  

바흐와 아벨은 런던에서 활동할 당시 개성있는 초상화가였던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와도 깊은 친분을 맺었다. 게인즈버러는 8대의 비올 악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풍경화를 그리며 인생의 남은 시간을 즐기고 싶다"라고 말할 만큼 비올라 다 감바 연주를 즐겼는데 게인즈버러는 바흐와 아벨과 교류하며 그들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게인즈버러의 그림은 프랑스 로코코 화가 와토 스타일의 갈랑트적 풍취를 가지면서도 특유의 빠르고 생동감 넘치는 즉흥적 붓질로 낭만적 감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그 시대의 문제작 혹은 개성있는 걸작으로 평가받았는데, 그의 붓질은 화폭에 그려진 대상이 '환영이 아닌 그림'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운동과 공기 속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시각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현대적인 요소마저 가지고 있었다. 위의 두 초상화에서도 옷의 질감을 묘사하는 부드러운 붓질은 사물을 명확하게 색칠하기 보다는 에둘러 묘사하며 그 형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 인물들은 배경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게슴츠레한 빛 속으로 스며들어가 있다. 이런 현대적인 시도는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며 새로운 음악 언어를 탐구하던 이 시대의 음악과도 상통하는 특성이다. 실제로 두 바흐 형제의 음악을 들어보면 바로크, 고전, 낭만파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어 시대의 거울과 같다. 바흐-아벨 콘서트는 초반의 '플레져 가든'에서의 성공을 등에 업고 하노버 광장에 그들만의 연주회장을 마련해 실내장식을 게인즈버러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우정만큼 그 당시의 예술도 유사한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산업혁명이나 대혁명 같은 정치적 격변 이외에도 문화 예술계에서도 바로크의 관습적 언어와 결별하며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반~19세기 초는 전통과의 단절의 시기였다. 미술사에서는 그리스 복고 운동이 일어나 신고전주의 양식이 정립되었고 음악에서는 바로크 춤곡으로 대표되는 갈랑트 양식, 그리고 수학적 규칙의 대위법을 중요시한 푸가와 같은 이성적 음악 대신에 내밀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고전파 양식이 유행했다. 바흐의 두 아들은 이런 시기에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음악을 구사했다.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가 하면 대중과의 고립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기도 했다. C.P.E 바흐는 특히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복고적 갈랑트 취향에 맞춰야 하는 어려움과 늘 맞닥뜨렸다. 그 자신은 오히려 낭만주의적 전통과 더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J.C. 바흐는 복고적이고 우아한 음악을 구사하면서도 현대 산업적 요소를 덧입혀 음악이 올려지는 상황을 현대적 자본으로 연출했다. 이것은 과거의 예술과의 결별, 후원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예술시장이 개편되고 개인으로서의 개성적인 예술가가 출현할 수 있는 당시 사회적 상황과도 맞닿아 있었다. 더 이상 과거 예술의 능숙한 구사가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고, 개성적인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와 결별해 비엔나로 건너와 개인 활동을 시작했고, 게인즈버러는 특유의 개성적인 붓질로 반 전통적인 혁신적인 초상화와 풍경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대를 선구적으로 견인한 음악가가 바흐의 두 아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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