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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를 따라 거꾸로 걸어간 곳의 끝

엄마 사랑해요

by 혁이

후회를 따라 걸어가면 그곳엔 행복이 있다.


난 영업직을 하는 29살 평범한 직장인이다.


일 때문에 만났던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으로 인해 후회라는 길을 거꾸로 걸어가게 됐다.


한 아주머니를 만났던 시간이었다. 일로 인해서 아주머니는 아드님께 전화를 해서 어떤 것을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받은 아드님의 첫마디는 "왜"였다. 귀찮은 듯이 말 한 그 한 마디를 듣고 난 뒤에

'아들은 다 비슷비슷하구나 이래서 딸 키워야 좋다는 말이 있구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전달이 제대로 안 됐는지 전화를 한 번 더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두 번의 전화가 끝난 뒤 아주머니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다행이다..."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주머니께선 아드님이 짜증을 안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 짧은 5분도 안 되는 순간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단, 상담을 마무리 한 뒤에 나는 바로 날 돌이켜봤다. 거울에 보인 것 마냥 아까 있었던 상황이 나와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 후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이고 나에게 사춘기가 왔었던 약 15년 전으로 돌아가봐도 나는 엄마라는 단어로 오는 전화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집 가서 볼 건데, 어차피 전화받아봤자 잔소리만 들을 텐데 이런 생각에 전화를 빨리 끊고 싶은 마음에 "왜"라는 단어로 시작을 했다. 그때부터 20대 초반까지는 계속 그랬던 것 같다.

군대를 갔다 온 뒤로는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단지 "왜"에서 "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왜는 왜 전화했냐는 듯이 짜증 내는 느낌이라면, 어는 왜 보다는 조금 순화된 말 같았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 후로는 나도 나이를 하나씩 먹다 보니 틱틱거리며 하는 왜나 어가 아닌, 조금 순하고 착한 말투로 "엉~" 아니면 "엉 왜?" 이렇게 변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고, 어 다르고 엉 다르다.


내가 그날 겪었던 짧은 상황 후에 혼자서 시간을 돌이켜보니 갑자기 엄마한테 연락이 하고 싶어 져서 핸드폰을 들고 엄마한테 카톡을 했다. 그런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도 전화를 안 하고 카톡을 한 점에 대해선 지금도 후회를 한다. 엄마한테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상황을 설명하고 그리고 엄마한테 그동안 미안했다고 내가 절대로 엄마가 싫어서 전화받을 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나에게 자주 쓰시는 사랑한다는 이모티콘 하나로 답을 보내셨다. 평소에는 그 이모티콘을 보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날 그 시간만큼은 그 이모티콘이 엄마처럼 보였고, 그리고 내가 아무런 설명을 더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이모티콘을 본 후에 내 마음에 쓰나미처럼 왔던 감정은 쓸쓸해 보인다는 그런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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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 하나로 그렇게 많은 감정들이 오면서 그때부터 후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상황이 그렇다. 살면서 짜증이나 불만이 가장 많을 시기인 사춘기 말고 그전으로 돌아간다면 기억은 희미하지만 누구나 엄마라는 사람에게 후회되는 짓을 한 적은 많을 거다.

반찬 때문에 투덜거린 적도, 학원 가기 싫다고 떼쓰는 것도,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내가 살면서 엄마에게 가장 후회가 되는 경험이 하나 있긴 하다. 그땐 내가 중학생 때였다.

중3이었고, 그 당시엔 학부모님들이 시험감독을 돌아가면서 하고 그러셨다. 그땐 엄마가 와서 시험감독을 하고 계셨는데, 그날 엄마가 시험감독을 하시다가 쓰러지시는 날이 있었다. 시험이 끝난 후에 담임선생님은 날 따로 부르셨고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엄마는 내가 시험에 집중을 못할까 봐 담임선생님께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이제야 말해주신다고도 말씀해주셨다. 난 지금도 그때의 모든 상황들을 기억한다. 울음을 참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쳐다봤던 내 손톱모양, 그날 먹었던 급식메뉴가 튀어서 셔츠에 묻은 얼룩 자국, 그리고 살면서 가장 크게 울음을 참았기에 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얼마나 생생한지 내 기억들을 현재진행형으로 적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도 그 교실의 상황은 또렷하다.

어느 정도 눈물을 참고 학교 후문을 나오고 병원을 걸어가는 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지나다니는 고양이나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줬으면 했다. 그 어떤 것들이라도 내 얼굴을 바라보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나는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조금씩 흘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병원까지 걸어갔다. 엄마의 병실에 도착하고 난 뒤에 엄마의 모습은 내가 살면서 본 엄마의 모습 중에 가장 쓸쓸하고 불쌍해 보였다. 엄마는 내가 온 걸 알고 나에게 했던 첫마디는 "시험 잘 봤어 아들?"이었다.

그 한 마디에 나는 그 당시에는 왜 화가 났는지를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그 당시엔 엄마가 아픈데 엄마 아픈 게 우선이지 내 시험이 우선인가? 이런 생각에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래도 화를 누르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면서 잘 봤다고 말했다. 잘했다고 엄마는 이제 안 아프다고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고생했으니까 집에 가서 쉬거나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내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엄마는 내가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을 당연히 안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고 끌어안아주셨다. 그리고 그 순간은 29년 살면서 가장 슬프게 울었던 순간이 됐다.

그 후로 엄마는 수술을 받으셨다. 지금 이런 상황이 온다면 엄마 옆에 꼭 붙어 있겠지만, 그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땐 병문안을 제대로 오래 있어 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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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날 상담이 끝나고 걸어갔던 후회의 길의 끝엔 행복이 있었다.

후회의 길을 끝까지 걸어보고 나니 보였다.

엄마가 보낸 이모티콘 하나에도 엄마의 사랑이 있었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그런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사랑해". 정말 보내기 힘들었다. 초등학생 때 어버이날 이후로는 사랑한다고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그래도 내가 엄마에게 했던 행동들과 말들을 되돌아보니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나왔다.

후회를 거꾸로 걸어보니 너무 감사했고 사랑하고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



이렇게 후회가 되는 일이 있으면 한 번쯤은 그 후회에 대해서 거꾸로 올라가 보시면 좋을 것 같다.

100% 완전한 행복이 아닌 찾아보면 1%의 행복이라도 있는 것이다. 내가 엄마의 이모티콘을 보고 걸었던 후회의 길 끝엔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내가 어떤 것을 도전하고 난 뒤에 실패를 해도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던지 간에 후회를 하는 상황이 온다면, 한 번은 그 시간들을 거꾸로 걸어보길 바란다. 거꾸로 가다 보면 그 후회까지 도착하는 데에 쏟아부었던 열정, 노력, 감정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 열정들과 노력들을 주워 담는데 비용은 없다. 그냥 시간을 거꾸로 걸어가 보면서 열정과 노력을 다시 담고 와서 한 번 더 해보면 되는 것이다.



ps. 상담이 끝난 후에 제가 엄마에게 했던 연락들을 되돌아보니 후회밖에 없어서, 한 번 되돌아봤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전 슬픈 감정만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너무 행복해지더라고요 :)

살아온 과정에도 대입해 보니까 쓸모는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글 남겨봤습니다. 혹시나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정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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