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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69년생 26화

작은 오빠.

by 김귀자

작은 오빠는 작지 않았다.

오빠는 그냥 오빠가 아니라, "찐"이었다.

국민학교 때 딱지를 뺏겼을 땐, 형이었다. 내 딱지 빼앗은 동네 오빠는 울오빠한테 엄청 맞았다.

울기만 하면 됐다. 소풍 갔을 때, 도깨비 풀 가시가 옷에 붙어도 모두 떼주었다.

간첩놀이도 같이 하고, 여름에 오빠를 따라 다니다가 땡삐집을 건드린 적도 있었다.

오빠가 면내 중학교에 갔을 때는 "종이인형"을 사주었다.

알록달록한 옷들이 이뻤다. 혼자말로 인형놀이를 했다.

"구두신어볼까."

"이 드레스 입어볼까."

총총 걸음으로 걷는 시늉도 하고, 인형이 못가는 곳이 없었다. 지금도 그 색감이 그려진다.

싸리나무로 화살도 만들어 주었다. 대문에 과녁을 그려놓고 맞추는 연습을 했다.

오빠가 중학교에 가면서, 놀아주지를 못했다.


나도 중학교를 입학했다. 오빠는 읍내에 있는 농고에 입학했다.

무슨 이유인지, 오빠가 고퇴를 했다. 학교 대신 농사를 택한 사람처럼 열심히 일했다.

노가다를 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동네 오빠들과 "대천봉"에 일을 갔다. 큰오빠도 같이 갔다.

나중에 들었는데, 시멘트를 나르는 일이었다고 한다. 너무 힘든 일이라 일당이 비쌌다고 했다.

동네 오뻐 중 한명은 도중에 돌아왔다. 남들은 한번도 겨우 날랐는데, 작은 오빠는 1.5포를 날랐다고 했다.

1포를 먼저 나르고, 중간지점에 또 한포를 나르고서야 잠을 잤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는, 감자전이 제일 먹고 싶다고 했다.

일하면서 돈이 아까워, 감자전을 못 사먹었다고 했다.

엄마는 감자전을 부치면서 울었다. 아버지는 평생 못 번 돈을 받아 보신거였다.

부모가 불쌍해보이면 안된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오빠는 죽을 때까지 엄마를 떠나지 못했다. 육남매 중 가장 애잔하게 살다 갔다.

그렇게 우리집의 가장으로, 나의 오빠로, 살아냈다.

'오빠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 했을까.'


오빠는 책을 좋아했다. 틈만나면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봤다. 책 읽는 오빠가 좋았다.

왠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도 없이 싱긋이 웃는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학교를 포기할만큼 엄마가 불쌍했을까.'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지를.'

'왜 하필이면 오빠여야 했을까.'


오빠보다 앞서 결혼식을 했다. 그때도 많이 미안했다.

어린 조카를 많이 이뻐해서 옷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는데, 울컥했다.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큰아이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오빠도 결혼했다. 새언니는 예뻤다.

삼촌 결혼식에서, 제대로 못 먹었는지, "미역국에 밥"을 달라더니 많이 먹었다.

엄마가 한시름 놨다.


오빠네 부부와 만나서 밥도 먹고, 대명에 가서 오리배도 타고 했다.

이때가 오빠 삶에 가장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언니가 노산이라, 시험관 아기를 시술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임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거였다.

'믿음이란, 이런 걸까.' 한치의 의심도 없는거 말이다.

언니와 함께 배불러서 다녔다. 조카가 태어났다. 예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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