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첫 명절을 보냈다.
시댁은 생각보다 작았다.
단칸방에 작은 부엌이 붙은 집이었다.
명절 동안 시댁에 다녀오고 돌아와
잠은 다시 신혼집에서 자곤 했다.
공간이 좁아서이기도 했고,
아직 모든 것이 낯설어서이기도 했다.
가을이 지나고
그녀는 임신 5개월에 접어들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마음은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10월 어느 날,
아버님의 부음을 들었다.
장례식장은 낯설었다.
시댁 어른들도, 분위기도 모두 낯설었다.
장지는 높은 곳에 있었지만
누구도 임산부인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남편 역시 아버지를 보내는 일로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따라 올라갔다.
배 속의 아이를 한 번 쓰다듬으면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그날 이후에도 길게 들은 적이 없었다.
죽음의 사유도, 삶의 무게도
남편의 침묵 속에 남아 있었다.
아이의 출산 예정일은 봄이었다.
2000년, 홍천의 작은 산부인과.
친정엄마가 함께 있었다.
분만 촉진제를 맞고 분만실로 들어갔지만
힘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대기실로 나왔다가
한참 뒤 진통이 짧은 간격으로 이어졌고
그때서야 다시 분만실로 들어갔다.
자연분만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처음 들렸을 때
기쁨보다 먼저 안도감이 왔다.
출산 직후 그녀는 곧바로 친정으로 돌아왔다.
조리원은 없었다.
그 시절에는 친정이 곧 산후조리였다.
엄마는 큰 솥에 미역국을 오래 끓였다.
짭짤하고 뜨겁고,
어딘가 묵직한 맛이었다.
그녀는 그 미역국을 많이 먹었다.
몸을 회복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엄마의 수고를 거절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한 첫 공간은 친정집이었다.
아이는 할머니 방에서 잤고,
부부는 사랑방에서 지냈다.
낮에는 아이가 엄마 품에 있었고
밤에는 울음소리와 함께 시간이 흘렀다.
출산휴직은 길지 않았다.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젖몸살은 심했다.
말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참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를 오래 안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안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 자주 보고만 있었다.
잠든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작은 손과 발을 확인하고,
다시 조용히 돌아섰다.
아이의 방은 따로 없었다.
늘 같은 공간, 할머니의 방이었다.
그 방 안에는 늘 같은 장면이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
본인의 몸도 지탱하기 힘든 나이였지만
아이를 먼저 업었다.
아이가 울면 말없이 업고 집안을 천천히 오갔다.
그녀가 옆에 앉아 있어도 엄마는 먼저 아이를 안았다.
힘들까 봐 그랬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슬펐고, 미안했다.
엄마와 그녀는 많이 대화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기질도 달랐고, 세대 차이도 컸다.
엄마는 서른넷에 막내딸을 낳았고
그녀는 언니와 오빠들 손에서 자랐다.
정서적인 신체 접촉도 많지 않은 모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사위와는 말이 잘 통했다.
남편은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런 사람과는 오래 이야기했다.
그녀와는 말이 적었지만
그것이 서운하다기보다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백일이 지나자 아이는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할머니 방 안에서 깨어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 잠시 서서 아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아 주기보다는 눈에 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방 안에는 언제나 같은 풍경이 있었다.
아이를 업은 엄마,
조용히 흔들리는 걸음,
말없이 이어지는 하루.
본인의 삶도 버거웠을 텐데
손녀를 먼저 업고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딸이라는 것을.
아이의 육아는 그녀의 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등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 안에서 엄마는 또 한 번의 삶을
말없이 견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