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허, 태양, 바람

by 석현준

난 태양도 별도 어느 광명체도 아닌 바람이 되고 싶습니다.
천년이 지나도 좋습니다.
은하수가 둥둥 떠다니는 우주 한복판이어도 좋습니다.



사랑도 슬픔도 아픔도 그저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히고 희석되어서 나중엔 그리 힘들지도 어렵지도 않은 환하게 빛바랜 사진으로 남겨집니다. 나도 당신도 누구에게 그런 존재로 남는다는 건 싫지 않아요? 난 엄청난 사랑으로 남고 싶습니다. 세상도 시간도 건너 갈 수 있는 초월적인 사랑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저 당신만 바라보다 사라진 바람으로 남고 싶어요. 누구나 날 우러러보지 않아도 그리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으니 머리 위로 선선히 부는 바람처럼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의 밑바닥을 모두 본 당신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모두가 가면을 쓴 것처럼 웃고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난 표정을 가려서 위선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역겹도록 싫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울었죠. 내가 깊은 수렁에 빠졌던 시간에 날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닌 나 자신의 슬픔을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주었죠. 겉치레가 아닌 내 슬픔을 이해하고 알아봐 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아는 당신은 태양이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저 칠흑 같은 밤하늘에 풀벌레 소리를 좋아하던 당신은 높은 곳에 별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혹은 그리 높지 않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동감이 가득한 별이 되고 싶었을까요? 그러던 당신이 하늘에 떠올랐을 땐 대낮이었습니다. 한창 밝을 시간에 태양으로 온 땅을 환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원치 않았지만 찬란했습니다. 어느 누가 봐도 놀랄 정도로 무용했습니다.

진실과 거짓 오해와 질투를 모두 남겨둔 이곳에서 당신을 마주합니다. 한밤중에 펑펑 내린 눈 위로 내 발자국 위를 따라 걷는 당신을 봅니다. 모든 것을 잊으려 혼자가 되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란 본래 누군가를 바라고 사랑하나 봅니다.

당신의 모습을 몰래 보고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았을까요? 이런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미안합니다. 내가 힘들 때 함께 울어준 당신에게 염치없이 내 이야기만 한 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난 여름 바람도 겨울바람도 좋습니다. 그냥 당신 주위를 너울너울 떠다니고 싶습니다. 이곳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시간을 건너 아주 먼 곳에 있는 폐허 된 도시에서도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모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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