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단면

by 석현준

기억하나요?
나의 모든 이야기들을
그대를 사랑했던 이야기를


05/01
혹시 듣고 있을까요? 아주 자그마한 행복 회로를 돌려봅니다. 혹여 듣고 있다면 내게 대답해 줘요. 모두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 속에 나는 얼마나 들어있는지요. 내가 들어있지 않나요? 아무 말하지 않을 거면서 내 전화는 왜 받았나요. 내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까요? 아니면 애절하게 당신을 찾는 그런 가슴 아픈 말이 듣고 싶었나요. 말하지 않아도 지금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어요 그댄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내게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당신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좋으니 당신이 편할 때 내게 전화 주세요. 언제라도 내가 받을게요.

05/05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의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짧은 신호음도 울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싫어진 줄 알고 전화를 하지 않았어요. 혹시 더 깊숙한 밤 속으로 숨어들까 싶어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잠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봐 전화를 하려던 것을 참다가 보니 오늘이네요. 네 얼굴은 목소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좋네요. 어린애처럼 울지는 않을게요. 내가 울면 가슴이 여린 당신은 얼마나 더 슬플까 싶은 생각에 홀로 눈물 삼킨 날들이 많아지면서 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냥 속에 꾹꾹 담아두고 살게 돼요. 많은 것들이 속에 담겨있다 보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가 너무 힘드네요.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내 버팀목이 되어주었는데 그런 당신이 없으니 힘겨운 세상이네요.

05/07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당신은 아직도 검은 암막 커튼을 걷어내지 않았더라고요. 당신의 세상은 온통 밤이었을 테죠. 날씨가 보이지도 않는 흑암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런 전화밖에 없다는 것이 쓰라리게 다가오네요. 밤에 내리는 비는 왜 이리도 쓰게 다가오는지 찬란하던 여름에 내리던 비와는 너무도 다르네요. 아픈 봄비를 맞으며 걸어왔습니다.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내 탓도 있을 테지만 한 번쯤은 맞아보고 싶었어요. 봄비를 맞으며 뛰어오는데 봄의 눈물은 너무도 차갑네요.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습니다. 그만큼 차가웠던 봄의 눈물이었고 당신의 눈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밤 울던 당신의 작은 어깨를 다독여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무엇이 그렇게 바빴던 걸까요. 평생 날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날 다시는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만 바라보겠습니다.

05/15
오늘로 하여금 5월의 모든 행사가 끝이 났습니다. 어린이날부터 스승의 날까지 모두가 행복하길 바란 5월이었지만 당신은 행복했을까요? 엄청났던 연휴에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휴일을 보냈지만 당신에겐 그저 어제와 같은 어두운 날들이었을까요? 찾아갈 부모님도 없던 나는 집에만 있었습니다. 조금이지만 당신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조용히 누워있었죠. 한평생 일만 해왔던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했던 걸까요. 아니면 마음을 털어놀을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요. 행복은 무엇이든지 가진 사람들에게만 내려오는지 아프고 소외된 사람에겐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이리도 나를 놀리는지 온몸의 힘이 빠지네요.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일했던 당신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갈듯하네요. 온몸을 불살라 일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05/23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너무도 비슷해서 까먹을 만큼 같은 날이었죠. 모두가 불금을 외치며 열심을 냈지만 나는 어제도 오늘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요. 사진첩 속에서 아련히 웃고 있는 당신의 사진을 보니 왠지 모를 슬픔에 잠식당한 듯싶어요.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나는 그 웃음 너머의 슬픔이 보였답니다. 모든 것을 숨기기 위해서 그저 웃는 당신의 모습은 알 것 같은데 자기혐오에 빠져 잠들어버린 당신의 슬픔 어린 얼굴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네요. 당신의 사진들 속엔 언제나 웃고 있던 당신의 미소 탓일까 분명히 아프면 누구나 울어도 되지만 당신은 아파도 웃을 것만 같네요. 자기감정도 모른 체 입은 멋대로 웃고 있을 것 같습니다.

05/31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엇이든지 시작과 끝맺음이 중요한 법이죠. 그래서 난 바다로 놀러 왔습니다. 아픈 5월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기길 원해서 억지로 나왔습니다. 나와서 바다를 보니 가슴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네요. 당신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나요? 바람도 쐬고 푸른 나무도 보면 당신의 마음도 안정되지 않을까요? 아직은 이른 바다라 사람들이 없어서 더욱 좋은 바다였습니다. 아직도 시리기만 하는 바닷물은 언제쯤 청량해질까요? 여름에 바다는 그렇게도 가슴을 뛰게 하는데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그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토록 시린 곳에서 얼마나 아팠기에 자진해서 아무도 없는 밤으로 들어갔나요. 당신도 언제나처럼 청순하게 다시 내게 오겠죠. 내일이면 초여름인데 당신을 볼 수 없어요. 이젠 내게 와줘요.

여름의 어느 날 밤_


터벅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을 보았지. 창백해 보이는 듯이 하얀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는 너의 얼굴이었을까? 한여름에 빛나던 별빛처럼 고운 얼굴과 옷가지에 홀린 듯 그 사람을 따라갔어. '천사일까?' 번뜩 떠오른 생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천천히 거리를 좁혀갔지.

그러다 우리 달동네가 훤히 다 보이는 높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선 나를 보며 싱긋 웃는 그 사람은 너였어. 온통 해와 같이 밝았던 사람이 달과 같아져 있었지. 그리고 보름달에 비친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정말 누가 보아도 천사 같았을 거야.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지.

환히 빛나던 너의 웃음소리는 어느새 그윽한 미소로 바뀌어있었고 천진난만한 것 같이 밝은 빛을 내뿜던 너의 몸짓은 무용한 백조같이 변해있었지. 너는 몰라볼 정도로 뒤바뀌어있었다.

옥상에 있는 벤치에 앉은 너는 새하얀 달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고마워"
온 세상을 뒤로하고 자신의 밤 속에 들어있던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어, 맑고 총명한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한 너의 소리는 내 마음을 울렸지. 온통 뒤죽박죽이던 나를 살리는 목소리였지. 시간의 단면에 담긴 길고도 긴 시간을 건너 너는 내게 와주었지. 이런 널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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