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책갈피 속에 어릴 적 소녀의 감성이 숨겨져 있다.
추억 속에 은행잎 단풍잎이 곱게 물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빨간 노란 꽃으로 변신한 가을꽃 너울너울 춤을 춘다.
키가 큰 나무 위에 높고 풍성한 은행 나뭇잎들은 노란색이 자연으로 다가와 넓은 광야에 파도치는 물결처럼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면 포근한 솜이불과도 같고 노란 융단 이 깔린 카펫과도 같다.
20여 년 전 용인 초부리 마을입구에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가을이 되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해마다 웅장하게 빛을 발 하였다. 진 초록색 이파리가 샛노랑으로 풍성하게 수를 놓아 풍작을 이루는 농부의 흐뭇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 정겹고 등대처럼 지킴이가 되어주던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어느 날 아침 그 길을 나서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몇십 구루의 은행나무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치 도둑이라도 맞은 듯 이게 무슨 일일까? 허전한 마음에 며칠 후 다시 그 길을 나와 보니 되돌아올 수 없는 은행나무들은 간데없고 작고 여리고 외소 한 이팝나무들이 낯선 가로수 길에서 이방인처럼 떨고 있는 모습으로 나란히 줄을 서있는데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계절은 변하여 가을의 정취가 풍성하게 무르익어가고 입동이 지나면서 그때 그 시절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이 문득 떠올랐다. 그 큰 은행나무들은 왜! 사라졌을까? 생각해 보니 노화된 나무들은 제거하고 열매의 냄새가 불쾌하여 시민들을 위한 용인시의 정책으로 과감하게 없애는 추세였나 보다.
이때쯤이면 유난히 아름답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은 사라지고 없어서 아쉬움을 남기지만 잊혀져가는 계절처럼 세상은 돌고 도는 변화 속에서 다시 만물은 소생하고 새로운 삶의 생명체로 새 잎은 솟아오른다. 지금은 용인 자연 휴양림 입구로 이정표가 바뀌면서 이팝나무 가로수길이 자리매김하였다. 여름에 피는 이 꽃들은 하얀 실 가닥처럼 펼쳐지며 멀리서 보면 솜사탕 같은 꽃으로 축제를 이루고 파티가 시작된다.
세월은 흘러 엄마 잃은 아이들처럼 떨고 있던 여리고 여린 이팝나무들은 어느새 그 길에 당당한 주인 이 되어 휴양림을 오가는 수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듬직한 지킴이가 되어서 풍요를 이룬다.
상상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풍경을 우리에게 선물로 가득 안겨준 이팝나무 가로수 길에서 꽃은 피고, 지고, 기쁨과 사랑과 정열과 희망의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하여 밝고 빛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