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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에르도 되지 못했지만

by LISA

예술을 사랑하지만, 내게 예술은 특별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음악은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나 작품을 보는 것도 내게는 숨 쉴 구멍이 된다. 운동 신경이 좋지는 않지만 도 닦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사격 같은 스포츠는 가까운 곳에 기반 시설만 있다면 매일이라도 하고 싶은 종목이다. 이렇듯 지금은 적당한 선에서 힐링 도구로 활용할 줄 알지만, 한때는 뛰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해온 플룻은 고등학생이 되도록 쉽지 않았다. 오래 하다 보니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꽤 잘한다 얘기했지만 스스로는 큰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다. 플룻은 관악기 중에서도 구강, 특히 입술 구조가 소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다 일어나 악기를 얹어도 떡 하니 들어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번 구멍에 각도를 이리저리 맞춰도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천차만별인 사람도 있다. 나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답은 연습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꾸준히 우물을 판 덕분에 고등학교 관현악단에서 단장을 하기도 했다. 나름 그 중에서는 '퍼스트'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문계에서 하는 관현악 동아리에 한계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도내 대회나 학교 축제 때마다 돈 써서 편곡까지 해가며 열심히 했고 자부심도 있었다.


그 자부심마저 와장창 깨진 것은 A가 입단했을 때다. 오디션을 보러온 더벅머리 A의 플룻은 가장 싼 연습용 야마하였다. 플룻을 분 지는 3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학구열 셌던 동네에서 관현악 동아리를 하려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마침 플룻 세컨드도 없었기에 웬만하면 그래도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어떤 곡을 하겠냐고 했더니,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을 이야기했다. 웬 팝송인가 싶어 피식 웃었다. 하지만 플룻에 입술을 대고 튜닝하는 순간부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초급자 특유의 탁한 소리도 바람 새는 소리도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연주가 1분을 넘어 가도록 "이제 됐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끝까지 다 들었다. 내가 수 년 간 해온 연주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입단 후 A의 실력은 더 급격하게 늘었다. 그래서 단장이지만 퍼스트를 넘겨줬다. 어차피 압도적인 실력 차이 앞에서 괜한 텃세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학교 축제 때는 쑥스러운듯 웃으며 지휘를 해보고 싶다는 A에게 기쁜 마음으로 "잘 부탁한다"고 했고, 우리는 클래식부터 가요, 애니메이션 OST까지 완벽한 레퍼토리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게 큰 충격, 동시에 부러움, 또 맑은 소리를 듣는 기쁨을 안겼던 A는 저러다 음대에 가는 건 아닌가 전망도 했지만 엉뚱하게도 천문학자가 됐다. 호주에서 교수가 된 그는 가끔 선배 동료의 홈 파티에 초대를 받으면, 꼭 플룻을 들고 가서 한 곡 뽑는다고 했다. 안 봐도 알겠지만, 다들 그 청아한 소리에 흠뻑 빠져들었을 것이다.


플룻이 부던히 연습해도 결국은 넘지 못할 벽 같았다면, 미술은 나름 탤런트를 타고 났다고 믿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좋아했다. 딱히 배운 적이 없지만 자연스럽게 포스터를 시작했고 남들은 질색하는 테라핀 냄새가 싫지 않아 유화도 익혔다. 꾸준히 즐기는 모습을 본 엄마는 중학교 때 나를 동네 미술입시학원에 데려갔다. 그린 그림을 본 원장은 "그뤠잇"을 외쳐주진 않았고, 대신 내 내신 성적을 듣더니 "어머니, S대 미대는 보내드릴 수 있어요"라고 했다.


첫 날 수업은 정물 뎃셍이었다. 열심히 깎은 4B 연필을 들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몇 시간을 씨름했다. 완성작은 처음 치고는 봐줄만 했다고 생각한다. 원장도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잘한 부분과 보완할 부분을 열심히 설명해줬다. 음악보다는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하다보면 더 트이겠지 생각했던 찰나, 내가 스케치북과 씨름 하는 내내 어디에서 놀다 왔는지 헐레벌떡 들어온 노랑머리 여자애가 연필을 들었다. 심지어 담배 냄새도 얼핏 났던 것 같다.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 앉아 한 30분을 쓱쓱 그린 그는 다시 어디로 사라졌는데, 스케치북을 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너무 잘 그려서. 그 후로도 비슷한 날이 반복됐고, 나는 자연스럽게 본업(?)으로 돌아갔다.


골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 홀로 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모님은 주말에 종종 라운딩을 데려나가곤 했다. 당시에는 골프가 대중화돼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복장도 엄격했고 아동에게 맞는 채도 없어 맞춰야 했을 정도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내게 레슨까지 시켜가며 함께할 시간을 마련하는 데 힘써주셨다. 요새는 주니어 골프가 흔하겠지만, 당시에만 해도 연습장에서든 필드에서든 공 치는 아이를 보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 배워놓으니 폼은 워낙 좋았어서 모든 사람들이 신기해하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큰 재능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라운딩을 나가도 타수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관심사는 오로지 '오늘은 그늘집에서 뭘 먹을까'였던 것 같다. 심지어 재미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더욱 골프는 비즈니스에 최적화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아이에게 이야깃거리도 없이 18홀을 도는 것은 운동이라기보다 그저 노동이었다.


그렇게 내게 여러가지 예체능은 씁쓸함만 남겼다. 살리에르는 이를 갈면서 노오력이라도 하며 괴로워했지만, 나는 포기도 빨랐다. 결국 살리에르도 될 수 없었고 그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데 대한 콤플렉스만 남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매력적인 아티스트나, 특정 분야에 천재 혹은 수재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면 너무 부럽다. 하지만 이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즐길 줄은 아는 여유도 생겼다. 최근엔 시간적 틈이 없기는 하지만, 음악은 늘 떼놓지 않고 있다. 국악부터 록, 클래식, 팝, 제3세계 음악까지 무엇이든 위로가 된다. 또 길을 걷다 그림이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꼭 들르곤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림을 그려주면 휘둥그레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 즐거움이면 내 삶에서 예술은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때로는 포기하면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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