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치

by LISA

응급실에서 정신이 혼미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흐르니 결국 갈 것은 갔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던 항응고제도 어느 순간 약통을 보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석 달을 먹었는데도 시간대마다 늘 깜빡했다가 황급히 챙겼던 걸 보면 어지간히도 먹기 싫었던 것 같다. 만약 이 분량을 또 먹어야 한다고 했으면 상당히 좌절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의사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고, 추적만 잘하면 되겠다며 '졸업'을 선언해 줬다. 이제는 쌈채소와 콩류, 과일즙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치아 스케일링도 시원하게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피가 좀 나거나 멍이 들어도 위험할 일은 없고, 생리 때마다 짧은 시간에 패드가 넘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출산 병원의 의사가 날 잡고 있지 않고 재빨리 응급실로 쫓아내 준 것, 의료대란 속에서도 혈관 전문의를 바로 만날 수 있었던 것, 희귀한 질환이었는데도 의사가 재빠르게 판단해 줘서 패혈증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 스스로도 너무 겁먹지 않고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 모두 운이었으며,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다. 살면서 또 이렇게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을 테고, 다만 또 위기가 오더라도 이번의 경험은 큰 디딤돌이 될 것 같다.


난관과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온몸으로 받아내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완전히 자신을 놓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퀀텀 점프'의 순간은 온다. 무슨 일에서든 그렇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나의 방식을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이라 우려했지만, 나는 조금 무식해 보일 수는 있어도 단지 용감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겪지 않았더라면 제일 좋았을 것도 사실이다. 결코 없었던 일처럼 살 수 없고, 심신의 흉터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꼭 꺼려지기만 하는 것인가,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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