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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오데트 Nov 22. 2023

올케가 둘째를 임신했다고 한다.

축하해주지 못한 미안함

“엄마, 뭐 하고 있었어?”


친정엄마의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밤 10시가 넘어 걸려온 남동생의 전화다.


"그냥 있었지, 이 야심한 시간에 웬일이야?"

“내가 사실 얼마 전에 꿈을 꿨거든, 붉은 새끼용이 깨어나는 꿈… 찾아보니 내년이 청룡의 해더라고?"

“설마 태몽이야?"

“혹시 몰라 오늘 00가 임신테스트를 했는데 두 줄이 나왔어.”

“오~~ 축하한다. 용꿈인 거 보니 아들인가."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우리가 내년에 애를 낳게 되면 서울에 와서 몇개월만 우리 애 좀 봐줄 수 있을까? 너무 어리면 어린이집에 보내기가 좀 걱정되서..."

“수민이는 어떡하고? 이제 내년에 학교 가는데, 2년 정도는 내가 봐줘야 너희 누나가 직장을 다니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거면 누나가 등원시킬 수 있지 않아?”

“내년부터 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럼 출근을 7시까지 해야 돼.”




축하의 마음이 올라오기도 전에 큰 돌덩이가 가슴에 얹힌 기분이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동생부부는 당장은 아니라고 했지만 둘째를 계획 중이라고 했다.


가까이 사는 장모님은 허리 통증이 심해 육아를 지속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그래서 첫째 아이도 돌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올케는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아휴직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 둘째가 생긴다면 옛날의 나처럼 친정 엄마에게 둘째를 부탁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친정엄마는 서울에 올라와서 2년이 넘게 우리 아이를 봐주다 몸과 마음의 병을 얻으셨다.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으로 메니에르라는 청각질환이 몸을 쳤고, 마음의 병이 뒤따라 왔다.

돈이 없어서 출산 5개월 후 바로 일을 해야 했던 나는 엄마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직장을 다녔다.

때로는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그런 희생이 당연시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니 엄청난 공포가 나를 덮쳤다.


‘나 때문이야, 나 살 꺼라고 엄마 보고 올라오라고 해서…’

‘엄마가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




새벽마다 ‘메니에르’와 ‘우울증’에 관해 검색했다.

이비인후과 의사인 지인과 심리학을 전공한 친구에게 상담을 받기도 했다.

메니에르로 귀에 불편함이 생기자 엄마의 우울감은 점점 극에 달했다.

성당 활동을 활발하게 하시던 분을 내가 괜히 발목을 잡아 이렇게 만들었구나 싶었다.

속이 답답하다해서 한 겨울에도 온 집 창문을 열어놔야 했다.

수면제 때문인지 엄마는 가다 물병을 떨어뜨리기도 했으며 시선은 늘 초점이 없었다.




가끔은 옥상에 올라갔다 한참을 있다 내려오셨다.

나중에 말하길 뛰어내릴까 말까를 몇 번이나 고민하셨다고.

‘내가 죽으면 애들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에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셨다.

우울증은 외할머니는 데려간 무서운 병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여러 번 병원을 옮긴 끝에 엄마와 잘 맞는 병원을 찾게 되었다.

약이 효과가 있어서일까, 엄마의 우울감도 약을 먹은 다음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엄마의 일상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일을 쉴 수는 없어 여전히 친정 엄마가 필요했다. 등원도우미를 쓰기에는 내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기도 했다.

당시 매일 부부싸움을 하던 남편에게 큰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계신 부산가서 살지 않을래? 내가 먼저 내려가서 자리를 잡을 테니 자기도 부산에 직장을 구하면 집을 팔고 내려와."


싸늘한 집안 분위기에 지쳤던 남편도 흔쾌히 합의를 했다.

주거지와 직장을 옮기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집은 오래도록 팔이지 않았고 시기에 맞춰 우리가 살 부산의 집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남편의 이직을 위해 계속해서 이력서를 넣었다.

집은 구했지만 집 대출까지 난관에 부딪히자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는 날이 많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 시간들은 모두 지나갔고 엄마도 우울증과 이별을 했다.

이제는 아이도 7세가 되어 조금은 사람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 다시 서울 가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긴 동생은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좀 더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기적인 딸이라서 그럴까, 사실 엄마의 건강보다도 내년에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는 내 사정이 더 걱정되었다.


마가 동생에게 당장은 힘들다고 선긋기를 해 두었지만 내 마음이 더 불편한 건 왜일까.

진짜 엄마가 올라가시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그리고 둘째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

내가 이렇게 내 걱정만 하는 사이 동생에게서 오늘 전화가 왔다. 프리랜서인 본인이 쉬든 알아서 할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것이다.




순간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돌 하나가 더 얹힌 기분이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여러모로 챙겨줬던 동생이었는데, 나는 내 걱정만 했구나.’

둘째를 가지면 제곱으로 힘들다던데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로는 그 경제적 여유가 부러웠다.


‘진작에 정규직으로 일을 했으면 나도 둘째를 계획했을까?’

‘무리하게 집을 구하지 않았다면 나도 둘째를 낳았을까?’


동생을 낳아달라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 그리고 이제야 축하를 해줄 수 있는 동생부부에게도, 그리고 여전히 도움을 받고 있는 엄마에게도...

온종일 안함이 남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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