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
유명한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가볼 이유가 없었다. 그날도 목적지는 해방촌이 아니었다. 그냥 흘러가듯 지나가던 길이었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 신호등 앞에서 그가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여기로 가볼까?” 그렇게 우리는 해방촌으로 들어섰다.
해가 막 떨어지려던 시간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도시는 가장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화려하다기보다 담담했고 그래서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로 불이 하나둘 켜지고 바람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아, 여기가 사람들이 말하던 그 해방촌이구나.’ 처음 와본 장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달리기를 하다 여기까지 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숨이 찼을 텐데도 멈추지 않고 올라왔다는 말이 이상하게 그다운 이야기처럼 들렸다. 실제로 그날도 골목 어딘가에서 이어폰을 낀 채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동네는 그렇게 각자의 속도로 살아온 시간들이 겹쳐 있는 곳 같았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그가 보내왔을 시간들을 함께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의 하루들 내가 없던 시절의 습관들 혼자서 쌓아온 호흡 같은 것들. 설명을 듣지 않아도 풍경이 대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인상 깊었다. 이곳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가 여기에 남겨둔 시간이 느껴져서.
생각해보면 사랑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지로 향하지 않는다.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운전대를 살짝 틀었을 뿐인데 뜻밖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과거를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오래 머물렀던 자리에서 잠시 함께 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사랑은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세계에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혼자 걸어왔던 길을 존중하고 그 위에 나란히 발을 맞추는 것.
그래서 때로는 말보다 풍경이, 설명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전해준다. 그날의 해방촌은 그런 장소였다. 우연히 들렀지만 오래 남았고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기록된 시간.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사랑을 배워갈 것 같다. 목적지보다 방향을 결과보다 과정을 조금 더 믿어보면서. 그리고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운전대를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