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 호의 뗏목>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메두사 호에는 군인, 관료 등 식민지 정착에 필요한 4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항해 중이던 메두사 호는 1816년 7월 2일 현재의 모리타니 해안에서 60㎞ 떨어진 모래톱에 좌초했다. 선장, 장교 등 높은 계급의 250여 명은 난파된 배를 뒤로하고 구명보트에 올랐다. 하위 계급의 선원들은 난파된 배를 분해하여 뗏목을 만들어 타야 했다. 뗏목은 선장이 탄 구명보트와 밧줄로 연결했다. 하지만 구명보트와 연결된 밧줄은 끊어졌다. 7월 5일 뗏목에 남겨진 150여 명은 망망대해를 표류하기 시작했다. 7월 17일, 지나가던 아르고스(Argos) 호가 우연히 뗏목을 발견했다. 생존자는 겨우 15명의 남자였다.
제리코는 약 5×7m의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에 이 역사적 사건 속 선원들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뗏목에 살아남은 자들은 평소 무심히 뱉었을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에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만 했다. 갈증, 굶주림, 공포 같은 원초적 자극은 선원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메두사 호의 뗏목> 속 선원들의 얼굴에는 이런 다양한 감정이 그대로 나타난다.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던 제리코는 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일이 생존자를 찾아다녔고, 같은 모양의 뗏목도 만들어 밀랍 인형을 세웠다. 시체나 잘린 신체 일부를 화실로 가져와 경직된 신체와 피부의 질감을 연구했다. 이렇게 탄생한 <메두사 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이 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 몰아낸 왕정파는 브루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혼돈 속에서 탄생한 새 정부는 무능했고, 부패했다. 귀족들은 저마다 프랑스혁명으로 잃었던 자신들의 부를 다시 찾고 축적하기에 급급했다. 왕정파의 귀족 출신이었던 쇼마레는 루이 18세에게 뇌물까지 바쳐가며 군함 메두사 호의 선장이 되었다. 식민지로 떠나는 배는 분명 많은 부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배를 통솔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 왕정은 처음부터 사건 자체를 숨겼다. 하지만 진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으로 선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5년 마다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해야 한다. 대통령은 우리의 주권을 행사할 대리인이다. 하지만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이 우리를 안전한 항구로 이끌 수도 있고, 생사를 위협할 전쟁터로 이끌 수도 있다. 어쩌면 본인의 안위를 위해 책임감이라는 밧줄을 끊어낼지도 모른다. 국민은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가?
<메두사 호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
예술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년~1824년)
국적: 프랑스
제작 시기: 1819년
크기: 491× 716㎝
재료: 캔버스에 유화
소장처: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