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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09. 2024

[4] 그림자와 친해지는 법

아침 6시.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집 안은 적막했다. 커피를 타서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는 쓴맛을 내고 있었지만, 그 쓴맛조차 무언가 빠진 듯했다. 아마 나 자신이 빠진 것 같았다. 대신 몇 주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이상한 질감이 더해졌다. 마치 습기처럼 자꾸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가라앉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문득 창밖을 보았다. 가로등 아래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가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마치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기 서 있었다. 순간 등줄기가 오싹했다. 나는 재빨리 커피를 들고 시선을 돌렸다. 아, 이런 거 싫은데.


아내가 출근하고 나는 혼자 집에 남았다. 적막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려 글을 쓰려고 했지만, 손가락은 멈춰 있었다. 마치 내 신체의 일부가 선행적으로 글 쓰는 걸 포기한 것처럼. 내 발가락은 노트북을 덮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어제 그 그림자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똑같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좀 무섭다. 용기를 내어 가만히 그 그림자를 계속 바라봤다. 어라? 나와 비슷한데, 뭔가 다르다. 마치 내 빈틈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는 듯, 아니면 비웃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그 그림자가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후, 머리를 식히려고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생각을 비우고 걸었지만, 그림자가 계속 따라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기습적으로 뒤돌아봤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내 발끝을 보니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근데 좀 이상하다. 내 그림자인데, 어딘가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내 그림자 맞나?

자세히 바라보았다. 발에 연결되어 있지만, 그게 나와 별개인 것 같았다. 이게 나를 놀리려고 태어난 존재일까? 그림자는 계속 비웃는 것 같았고, 나는 슬며시 발로 툭 쳐봤다. 근데 그 그림자는 도망치지도 않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버텼다.


그날 밤, 침대 위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서서히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 위로, 벽을 타고 천장까지.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그림자는 "나 아직 안 갔어"라는 듯 날아다녔다. 내가 병에 걸린건가? 심각하게 생각할수록, 점점 더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생각 끝에 모기를 내쫓는 심정으로 창문을 열었다. 밖을 보니 가로등 아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보니 확실히 보였다. 그건 나였다. 근데 자세가 뭔가 좀 더 자신만만하게 서 있었다. 마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며칠 후, 나는 그 그림자와 대면하기로 결심했다. 무서워하는 건 그만하고, 그 친구(?)랑 좀 대화라도 해볼까 싶었다. 다시 그 가로등 밑으로 갔다. 그림자는 대놓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앞에 섰다. 그러자 그림자는 마치 "드디어 왔냐?"라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림자는 내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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