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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정 Sep 10. 2024

[5] 리모컨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 세상이 이상해졌다

아침 6시. 늘 그렇듯 눈을 떴다. 거실로 나가 커피를 타서 앉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익숙한 공간인데, 어딘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리모컨이 사라졌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아침에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리모컨이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리모컨을 찾으려면 움직여야 하니까. 소파 쿠션 아래를 뒤지고, 테이블 밑을 봤지만 없었다. 리모컨이 없어진 자리에 웅덩이 같은 빈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 리모컨이 사라진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가가 사라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며칠 후, 이번엔 헤어핀이 사라졌다. 나는 헤어핀을 쓰지 않지만, 딸이 아침마다 머리를 고정하느라 쓰는 그 작은 핀. 그런데 핀 하나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딸이 당연히 "아빠, 내 헤어핀 봤어?"라고 묻기에 나는 무심코 "그거, 존재했던 적이 있나?"라고 답했다. 진짜로. 왜냐면, 그 핀은 분명히 있어야 했지만 이제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또 그다음엔 찻잔 받침이 사라졌다. 한때 주방에 분명히 놓여 있었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찻잔 받침. 사라지고 나니 그 빈자리가 더욱 두드러졌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받침대 하나 없어져서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근데 이상한 건, 물건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에 자꾸 빠져든다는 거다.


내가 이 현상을 아내에게 설명하려 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깜빡하고 어디 두고 온 거 아냐?" 아내의 설명은 언제나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찻잔 받침이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 그 빈자리에서 찾잔의 허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또 다른 날, 손톱깎이가 사라졌다. 이젠 정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작은 물건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나? 이쯤 되니 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 주위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차례로 나를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진 건 손톱깎이였지만, 손톱깎이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 현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현실에서 뭔가 균열이 생긴 게 아닐까? 문득, 내가 평행세계로 살짝 발을 들인 건 아닌지, 물건들이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하루는 집에 있던 빨대 하나가 사라졌다. 빨대는 그냥 플라스틱일 뿐인데, 내가 그걸 찾아야겠다고 느낀 순간, 마치 빨대가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건 진짜 뭐지?" 나는 빨대 하나 때문에 세상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거란 황당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림자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마치 "이번엔 뭘 잃어버렸을까?" 하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약간은 흥미롭기도 했다.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이 현상. 나 혼자만 잃어버리는, 나 혼자만 빠져드는 기이한 세계. 아무도 모른다. 내가 혼자 이런 식으로 사소한 것들의 반격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걸.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리모컨은 그날 바로 찾긴 했다,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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