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교보문고에 간다. 십만 원 남짓 책 몇 권을 사고, 보통은 그달 안에 다 읽는다. 1월을 위해 골랐던 책은 렛뎀이론, 비범한 평범, 늙지 않는 뇌 였다.
그리고 다 읽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끝까지는 갔다.
그래서 오늘, 2월의 책을 사기 위해 다시 교보문고에 왔다. 카페 한쪽 원목 테이블 위에 방금 고른 책들을 가지런히 쌓아두었다.
두툼한 철학서, 뇌에 관한 책,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책들. 표지도, 두께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더미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이번 달에도 내가 도망치지 않을 이유가 생긴 것 같아서다.
내가 책에 집착하는 이유는 솔직히 하나다.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덜 아깝기 때문이다. 게임을 할 때는 즐겁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몇 시간이 통째로 사라져 있다. 그 뒤에 남는 허탈감은 생각보다 크다.
책은 다르다. 잘 읽히지 않은 날조차도 무언가 남아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읽기 싫은 날도 많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예전에는 그럴 때면 며칠씩 책을 멀리했다. 그러다 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일을 또 해내지 못하면 자괴감이 밀려왔다.
다시 책을 집었다가 지루함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 지금의 습관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읽기 싫으면 딱 한 페이지만 읽는다. 혹은 한 챕터만. 사유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완벽한 이해보다는
완결에 방점을 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책의 흐름에 올라타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엉덩이를 붙이고 단숨에 읽어버린다. 아마 900권쯤 읽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책 읽는 일조차 내 삶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권수에 집착했다. 한 권, 두 권 숫자를 쌓아
나는 이만큼 읽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의미 있는 숫자를 만드는 데만 집중했으니 내용이 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쌓인 활자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금도 정독하는 편이지만 예전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지 않아도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뇌가 활자를 보고 이해하는 일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조급하다. 빨리, 더 빨리라는 말은 좀처럼 내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 공부는 2월이면 5개월 차에 접어든다. 여전히 벙어리다.
물론 아주 작은 진전은 있다. 다만 머릿속에 그려놓은 유창한 나와 지금의 나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이 글을 마치면 나는 또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다. 느린 거북이 같은 삶이지만 하다 보면 늘긴 하겠지. 어쩌면 내가 매달 책을 사고, 한 페이지라도 붙잡고, 공부를 이어가는 이유는 대단한 성취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속도가 느려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기록을 이렇게 또 하나 남긴다.
오늘도 글쓰는 재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