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충분하다.

by 재윤

자정이 넘었다. 지난주부터 주말에는 꼭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집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가라앉고, 집중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약속을 잡거나, 혼자서라도 카페에 간다. 오늘도 잠깐 매장에 들렀다가 골프 연습을 하고, 축구 송년 모임에 다녀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밤의 끝을 붙잡고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2차에 잠깐 얼굴만 비추고 조금 전에 집에 들어왔다. 물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을 끊었다고 하면 다들 놀라며 묻는다. 정말이냐, 무슨 일 있느냐, 어디 아픈 건 아니냐고. 일일이 설명하기가 번거로워서 그냥 나이를 핑계로 넘긴다. 사실 서른을 지나 마흔이 될 때까지는 나이 드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흔넷은 솔직히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른 초반에 처음 창업을 했을 때,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렸다.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어리다는 것. 마흔쯤 되면 몰라도 서른은 너무 이르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마흔을 넘기고 보니, 누가 뭐래도 한 살이라도 젊은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힘들었던 삼십대를 지나 지금은 조금은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이에 대한 아쉬움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풋살 모임 단톡방에는 여전히 밤의 열기가 남아 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진과 영상이 연신 올라온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그 장면을 바라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문득, 술에 취한 나를 맨정신의 사람들은 이렇게 바라봤겠구나 싶어 괜히 부끄러워진다.


잠이 오긴 했지만 책을 펼쳤다. 요즘은 다시 독서 습관을 챙기려고 노력 중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늦은 시간이지만 오늘도 몇 줄이라도 적으며 습관을 지켰다. "해냈다," 라는 말로 오늘을 마무리한다.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진다. 인생의 굴레와 각자의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의외로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생각에 도달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이다. 그 출발점은 대부분 고통이다. 고통을 견디며 쌓인 경험이 사람을 조금 더 깊게 만들고, 삶을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직 내가 어떤 경험을 더 겪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조금씩 분별이 된다. 술을 끊은 것도 그중 하나다. 내 삶에 있어서 술은 더 이상 옳은 선택이 아니었고, 그래서 내려놓았을 뿐이다.


술을 끊고, 하루의 리듬을 다시 만들다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 변화는 결국,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했고, 또 온전히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다. 다만 그 과정이 늘 건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불안이 컸고, 애정에 대한 갈구도 컸다. 그래서 주는 사람이라기보다, 받는 사람이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때로는 일부러 망가진 모습을 보이며 상대의 연민과 돌봄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문득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사랑은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사람의 문제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 아닐까.


생각해보면 인간은 누구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도 있고, 힘든 가정사를 가진 사람도 있다.돈이 없는 사람도 있고, 술에 취한 사람도 있다. 조건을 하나씩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완벽한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건 다른 데 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편안한지. 그리고 그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는지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지는지, 혹은 서서히 무너지는지. 이번 사랑에서 나는, 무너지기보다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이번에는 그렇게 사랑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아끼지 않고 주었다. 웃프지만, 결과적으로 지금도 나는 혼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랑이 곧 실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지 못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었는지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랑은 끝났지만, 나는 더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를 조건이 아닌,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랑을 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다.

오늘도 글쓰는 재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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