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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귀해질 때입니다.

육아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는 법

by 심연

우리는 흔히 엄마는 위대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왜 엄마를 위대하다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출산의 고통을 겪고, 한 아이를 낳아서? 아니면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대단한 모성애 때문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셋째를 출산하기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위대해졌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매일 육아로 고군분투하는 모든 엄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장 우는 아이를 달래고, 먹이고, 재우느라 나 자신은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게 이 시대 엄마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이겨내고 한 아이를 낳아서 위대한 게 아니라, 한 아이를 키우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퀘스트들을 다 이겨낸 경험치로 점점 위대해지는 거라고 말이다. 첫째 때는 어려웠던 일들이 둘째 키울 때는 수월해하는 변화를 느낄 때면 스스로 '이제 제법 엄마 태가 난다'며 뿌듯해하곤 했었다.




그런데 셋째를 낳은 다음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모래주머니가 올라와있는 배를 보며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아마 출산 직후 호르몬 등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센티해지는 감정의 영향도 있었을 거다. '이 배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아이들 세 명이 나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아이를 셋이나 낳은 스스로가 대단하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때, 한 사람의 인생이 온다는 말을 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만약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 살았다면 나 한 사람만의 인생일 뿐이었을 텐데, 아이를 낳음으로써 무려 세 명의 인생이 더 생긴 셈이니 말이다.


한 명의 인생이 네 명의 인생으로 펼쳐졌다고 생각되니, 뭔지 모를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이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위대한 이유는 양육 과정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이 땅에 낳는 그 순간부터 엄마는 위대한 존재였던 거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의 인생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좌지우지한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그저 내 배에서부터 각기 다른 삶이 생겨났다는 게 신기한 것뿐이니 말이다.)


한 명의 인생이 네 명의 인생으로 펼쳐지는 매직, 알고 보니 엄마가 된다는 건 럭키비키한 일이었다.


0.78명, 사람들은 초저출생시대에 아이가 귀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엄마가 더 귀해진 시대다. 아이의 수보다도 더 적은 게 엄마의 수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말처럼 엄마를 그리 귀하게 여기는 것 같진 않다.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출산과 육아는 엄마가 사회적 경력 단절로 이어지는 가장 큰 이유며, 아이를 키우는 일이 물경력으로 치부되기 일쑤니 말이다.


엄마 본인들도 마찬가지다. 엄마들 중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귀하다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도, 일상의 많은 부분도 내려놓았건만, 자식을 키우며 만나는 자신의 못 난 부분에 크게 자책하고, 다른 집들과 비교하며 그만큼 해주지 못하는 처지에 한탄한다. 그러면서 100의 사랑을 줬어도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미안해한다. 모성애가 엄마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려고 생겨난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아이가 셋 일 때, 주위에서 "대단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아이 한 명도 낳아 기르기 어려운 시대에 아이가 셋이나 있으니 말이다. 셋째 임신소식을 알린 날, 주위에서는 애국자라며 치켜세워줬지만, 솔직히 난 그날 현실적인 고민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아등바등 아끼고 절약하며 아이들에게 지원한다 한들, 아이가 하나인 집보다 지원할 수 있는 범위가 적기 때문이다. 마음만큼 해줄 수 없는 현실에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런데 고민이 길어질수록 마음만 불편하지, 딱히 해결책도 없었다. 이미 아이는 셋을 낳았고, 더 나은 집들과 비교를 하자면 끝도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상황 내에서 아이들을 잘 키우기로 했다. 주위의 비교가 아닌, 상황의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주기로 했다. '이 정도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가 아니라, '이 정도 해주면 충분하잖아?' 하는 근거 있는 자신감도 갖고 말이다.




사회적 제도 개선은 시일이 걸릴지라도, 스스로 귀하게 여기는 일은 지금이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나 엄마가 될 수 없는 시대에, 당신은 귀한 엄마니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자신의 이름과 아이들을 같이 세상에 남긴다. 세상에 있을 땐 아이들이 엄마의 중력이 되어 이 땅에 애정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어주고,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는 아이들만이 내 존재를 기억하고 그리워해준다.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엄마가 되기 어려운 시대에, 엄마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려 한다.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해하지 말고, 작은 성장과 성과에 크게 기뻐하고, 행복해하려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위축되지도 않을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조금씩 노력해 나가는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예뻐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커가는 자존감과 엄마부심으로 내 아이들을 귀한 사람으로 키울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초저출생시대, 바로 엄마가 귀해질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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