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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셋, 셋째를 출산하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91년생이 왔다

by 심연

긴 연휴가 시작되기 전인 1월 27일 새벽, 첫째 둘째를 친정부모님께 맡긴 채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나보다 더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 생각에 씩씩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평소보다도 일찍 일어난 첫째와 둘째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엄마~" 하며 울면서 달려와 안기는 첫째와 둘째. 17개월 된 둘째는 엄마가 어딜 가는지는 몰랐었을 텐데도, 직감적으로 오늘 이후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걸 알았던 것 같다. 떠나기 전 품 안 가득 두 딸들을 안아주다 보니, 주체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남편과 부모님께는 '세 번째 출산인데, 뭐가 무서워~'라며 소위 센 척을 했지만, 그게 허세라는 걸 마지막에 들켜버렸다. 출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앞으로 3주간 못 볼 내 새끼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저밀 듯 먹먹하게 올라왔다.


엄마 동생 낳고, 얼른 올게!



셋째 출산은 대학병원으로 오게 됐다. 요즘은 의료기술이 좋아져 동네 산부인과에서도 제왕절개로 셋째, 넷째를 출산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지만 둘째 출산 때 유착이 심했던 내겐 대학병원이 최선의 선택지였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이 위급상황이 발생 시 대응이 빠를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 번째 출산이니, 덤덤하지 않냐고 했지만, 오히려 세 번째 출산이라 걱정이 더 많았다. 출산 시 지혈이 안 될 경우 자궁적출까지 할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맴돌았고, 전날 인터넷에서 셋째 제왕절개 출산 중 산모가 사망했다는 글까지 본 뒤라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저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기만을 바랐다.


대학병원의 공기는 동네 산부인과와는 사뭇 달랐다. 낯설고, 차갑고, 그리고 분주했다. 수술시간 3시간 전에 도착해서 준비를 마쳤지만, 앞 수술이 지연되면서 무려 5시간 대기 끝에 수술실에 들어가게 됐다. 양 손목에 링거를 꽂고, 휠체어를 탄 채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수술실 문 앞까지 도착했다. 남편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 홀로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 시간, 이제부터 나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속으로 '잘 될 거다. 잘 될 거다. 잘 될 거다.'를 여러 번 되뇐 채 수술대에 올랐다. 익숙한 교수님의 얼굴을 보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교수님의 "수술 시작 할게요~"라는 말과 함께 기억을 잃었고, 일어나 보니 회복실이었다.


주위에서 "환자분 일어나세요"라며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일어나려는 의지와 달리 눈꺼풀은 자꾸 감겼다. 몸은 추웠고, 정신은 비몽사몽 했다. 아이는 건강히 태어났을지 궁금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도 너무 보고 싶었다. 이동식 침대에 누워 회복실 밖을 나오니, 남편과 시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어떻냐는 물음에, 아이도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고 했다. 참 다행이었다.


수술 5시간 만에 만난 우리 셋째


전신마취를 했던 내겐 눈을 감고 뜬 찰나의 시간이었는데, 일어나 보니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마취에서 깨어났나 싶었는데, 유착이 심해 수술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보통 아이가 나오고, 한 시간 이내에 산모가 회복실로 가는 게 정상인데, 난 회복실로 옮겨가기까지 무려 3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내가 전신마취로 기억을 잃어있는 동안, 남편은 수술현황판을 보며 마음이 복잡했던 것 같다. 자신의 아내보다 더 늦게 수술을 시작한 사람들도 차례차례 회복실로 옮겨가는데, 아이가 나왔음에도 여전히 회복실로 가지 못하고, 수술 중 명단에 떠있는 아내의 이름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지. 평소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 긴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됐다'는 그 네 글자에 그의 마음의 깊이가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졌다고 해도 매 출산은 엄마가 생사를 걸고 하는 어렵고 숭고한 일이었다. 그리고 건강하게 수술방을 나올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 감사한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정신이 들고 난 뒤 집에서 아이들을 봐주고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은 순산한 딸을 격려해 주며, 축하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다행히 우리 두 딸들도 외할머니, 할아버지와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배가 아파 크게 웃을 수는 없었지만 이제 곧 아이들 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그렇게 난, 서른네 번째 생일을 이주 정도 앞두고, 쌍삼의 나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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