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연 Oct 11. 2023

참을성을 나눠드립니다

참는 게 이기는 시대는 지났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라는 짤을 본 적이 있는가? 이는 개인별 강약점은 신이 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라는 위트 있는 가정으로 출발한 이미지다. 키가 작은 친구는 신이 실수로 '키' 성분을 조금 넣은 거고, 화를 잘 내는 친구는 '분노' 성분을 너무 많이 넣은 거라고 한다.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한 사람은 없고, 어느 한 부분이 특출 나면 다른 부분은 부족하다는 진리도 내포되어 있다. 재미있는 표현방식덕에 한때 이 이미지는 SNS상에서 큰 유행을 했었다.


누구나 본인이 가진 스펙 중 지나치게 많이 발달해 골치인 부분과 부족해서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안 쓰는 물건을 무료 나눔 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과잉발달된 본인의 성격적인 부분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눌 수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부족한 성격적 부분을 나눔 받고 말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1순위로 나눌 대상은 바로 '참을성'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잘 참는 아이였다. 고통도 잘 참았고, 화도 잘 안 냈다. 부모님의 말에 따르면 난 떼 한 번 안 쓴 순한 아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성숙하고 얌전하다며 나를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잘 참는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점이 많았다. 시험을 준비할 때는 유혹을 잘 참으니 원하는 성과를 빨리 얻었고, 사회생활을 할 때는 빌런들을 잘 참으니 훌륭한 직원이라는 좋은 평판이 뒤따라왔다.


하지만 뭐든 과유불급이다. 너무 많으면 부족하느니 못하다. 사람들은 대게 참을성이 많은 성격의 단점으로 속앓이 정도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성격의 치명적 단점은 바로 위험 시그널을 늦게 캐치한다는 거다.


사람의 뇌는 정교하고 똑똑하다. 그래서 몇 가지 불안 시그널이 포착되면 뇌에서는 '위험 상황이니 대피하라'는 경고 사이렌을 울린다. 하지만 참을성이 많은 사람들의 뇌는 일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같은 불안 시그널을 보고도 위험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빈도가 현저히 낮다. 하도 참는 게 익숙해져서인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펄펄 뛸 일에도 이게 화낼 일인가 싶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이라면 진즉에 도망갔을 타이밍에 가만히 있다가, 자신이 완전히 태워졌을 때 뒤늦게 위험했구나를 깨닫는다.


잘 참는 사람들은 통각에도 둔하다. 외면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에도 둔하게 반응한다. 부딪치기만 해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등 뒤에 칼을 꽂아도 허허 웃으며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분노로 표출되는 끓는점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분노 버튼이 눌러지기까지 상당 시간이 걸린다는 건 오랜 시간 나 자신이 상처받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나를 모욕하는 사람들의 시그널을 제때 감지하지 못하고 나를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것을 뜻한다.


뒤늦게 '이건 아니다'라고 깨달았을 때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땐 참아준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참아준 게 아니었다. 문제를 외면하고 회피한 거였다.


참는 건 이기는 게 아니었다.


적절한 참을성은 나를 성장시킨다.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나를 다치게 한다. 참을성을 덜어낼 필요가 있다. 혹시 참을성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무료로 나눠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대판 양치기소녀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