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마사 Oct 16. 2024

동성동본만 아니었어도

소개팅 필패의 역사

이번엔 좀 슬픈 이야기다. 당사자들은 서로 좋아했는데 주변 환경에 의해 갈라진 케이스이니까 말이다. 내 소개팅 역사 중에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직장을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회사 직원이 소개팅을 해보라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그때 나이가 30 중반쯤이었을 때인 것 같다. 그때는 지금처럼 소개팅에 간절하지는 않았었다. 언젠가는 짝을 만나겠지라며 느긋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들어오는 소개팅을 마다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었다. 별 기대 없이 나간 소개팅이었는데 오히려 이런 자리에서 잭팟이 터지는 모양이다.


간호사라고 직업을 말한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였다. 말도 조곤조곤 말하는데 리액션이 너무나 좋았다. 첫 만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나게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그녀가 장단을 잘 맞춰주다 보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 이후로도 여러 번의 만남을 가졌다. 당시에도 몇 번의 소개팅을 통해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하던 상황이었는데 그녀와의 만남은 힐링이었다. 더 이상 다른 만남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너무도 잘 풀린 나머지 따로 고백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연애 코스로 가겠다 싶었다. 집에 그녀의 성씨를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들이 평소와는 달리 신이 난 모습을 보고 부모님께서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셨다. 잔뜩 들뜬 표정으로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님께서도 뛸 듯이 기뻐하셨다. 나이를 자꾸 먹어가는데 여자 친구가 없는 것을 걱정하시던 상황이었으니까.


좋은 분위기는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서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녀의 성씨는 '홍'씨였다. 나 역시 '홍'씨다. 같은 성씨였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설마 홍 씨가 본이 하나밖에 없겠냐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성을 들은 부모님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토록 완고한 부모님의 얼굴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도 반대로 하지 않았던 인자한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단호하게 안된다고 선을 그으셨다. 홍 씨는 본이 하나라며, 동성동본은 죽어도 안된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은 그녀와의 다음 만남에서였다.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으로 반지를 몰래 사서 좋은 음식점을 예약해 놨었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커피를 마시며 고백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 만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녀의 친언니에게 온 전화였다. 전화 내용은 간단했다. 헤어지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정 안되면 해외에 나가서 살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에게 전화를 받고 나니 모든 의지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자립할만한 의지도 없었고 자립할만한 능력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만 믿고 둘이서 살기에는 고난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래도 그녀의 손을 잡고 도피를 해서라도 살아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후로는 그녀처럼 잘 맞는 이성을 만나보질 못했으니까. 눈빛만으로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그런 이성을 만나지 못했다. 이후로 이어지는 소개팅 패배의 역사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녀만 한 상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한없이 차올랐다. 아마 여자 때문에 울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이후로 수많은 여자들에게 차이고 사귀다가 헤어졌어도 그때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뭔가 마음의 한 구석이 무너져 버린 것일까? 부모님께서도 내심 후회하고 계실지 모른다. 동성동본 자체가 법으로 막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국내 관습 때문에 제대로 된 결혼식이 힘들고 친인척들의 색안경을 낀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부담이 있을 뿐이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와 너무도 잘 맞았던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고 난 지금까지 싱글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이전 09화 만나는 사람 없다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