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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마사 Oct 02. 2024

맥주가 그렇게 좋더냐?

소개팅 필패의 역사

왠지 모르지만 수달이는 자신에 차 있었다. 이번만큼은 확실하다며 자신만 믿으라는 말을 하면서 내게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매번 속는 셈 치고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자신감을 보인다면 뭔가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 당일날 한껏 빼입고 약속장소인 강남역에서 기다렸다. 압둘 사건(1화 참고)으로 안 좋은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지만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고 언제까지 꿍해 있는 것도 보기에 안 좋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강남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하늘하늘 원피스를 흔들거리며 남자친구와 만나는 아가씨들을 보며 나도 곧 저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저기요. ㅇㅇㅇ님 맞으세요?"

"안녕하세요? 제가 바로 ㅇㅇㅇ입니다."


일단 약속시간은 늦지 않았다 합격!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플러스 1점! 수달이가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강남역에서 만난 그녀는 강남 분위기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지. 보통 소개팅하면 차 한잔을 하고 저녁을 먹거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차를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공식 아닌 공식이었다.


나도 미리 그런 식으로 동선을 짜놨었는데 어디로 갈까요? 하는 나의 말에 그녀에게서는 전혀 엉뚱한 답이 나왔다. 날이 후덥지근하니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러 가자는 것이다. 초면에 술이라고?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상대가 그렇게 나오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 어색한 분위기가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이자까야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안주와 생맥주를 시켰다. 당시에는 그래도 지금보다 물가가 싼 편이었지만 일본 생맥주는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비싼 일본 생맥주를 거침없이 시키는 것이다. 뭐 한두 잔 먹으면 되겠지 라는 생각에 그녀가 원하는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것은 패착이었다. 뭔 놈의 술을 그리도 잘 마시는지... 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잔을 비워대기 시작했다. 마치 맥주와 사생결단을 내러 나온 사람 같았다. 말술이란 게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맥주는 많이 마시지 못한다.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맥주를 많이 마시면 배가 불러서 다른 것을 못 먹기 때문이다. 첫 잔은 맥주를 마시고 소주로 변경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녀는 줄 곳 맥주만 마셔댔다. 그것도 비싼 아사히 맥주를 말이지. 쌓여가는 맥주잔에 신경을 쓰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그랬었다. 한 달 생활비도 정해져 있었고 요즘처럼 쓸 때 팍팍 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마시는 맥주에 압도 되는 바람에 소개팅은 뒷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 역시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회사에서 답답한 일이 있다고 하긴 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술로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왜 내 카드로 마시냐 이 말이다! 안주가 떨어져 가는데도 뭔 놈의 맥주를 그리 부어대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뱃속에 맥주 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맥주로 시작해서 맥주로 끝나 버렸고 애프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맥주가 당긴 모양인지 나에게 문자가 왔었다. 강남역에서 보자는 문자였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그날 긁었던 카드값이 생각나 버렸다. 뭔 놈의 맥주로 양주값이 나오는 건지...


그렇게 그녀와는 첫 만남을 끝으로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수달이는 어쨌냐고? 첫 만남 이후에 따지기 위해 만나기는 했다. 수달이 말로는 그 동생이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게 많이 마실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의 카드로 먹어서 그렇게 신나게 마셔댄 것일까? 어쩌면 그녀는 시대를 잘 못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세상이었다면 맥주 먹방러로 너튜브에서 이름을 좀 날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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