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마사 Oct 30. 2024

이것은 정략 소개팅?

소개팅 필패의 역사

정략 소개팅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아마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정략결혼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을 거다. 사극이나 현대극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말이니까. 정략결혼이란 가문대 가문끼리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식들을 강제적으로 결혼시키는 일을 말한다. 역사적으로는 이런 사례가 제법 있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의 발호를 막기 위해 각 가문의 딸들과 혼인을 맺다 보니 부인이 수십 명이 생기기도 했었다. 이는 후대에 아들 간의 권력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오늘 이야기할 것은 역사 이야기가 아니니 여기까지 하기로 하겠다. 그렇다면 정략 소개팅은 무엇인가? 소개팅이라는 것을 이용할 정도로 내가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일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회사 대표의 호출로 사장실에 들어갔다. 대표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소개팅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것도 거래처 아가씨와 해보라는 거다. 추석을 앞둔 이 시점에서 소개팅이라니... 살짝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물이 덜 묻었던 나로서는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싱글인 나에게 회사에서 배려를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거래처 여직원과의 소개팅은 그전에도 몇 번 있었던 일이라 이상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 여직원이 다니는 회사와는 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부족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추석연휴가 끼어 있는 바람에 일정에 과부하가 걸리던 상황이기도 했다. 그 회사에서는 추석 이후에 바로 서비스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추석연휴 때 근무를 강행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 역시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일이 급하다고 해도 추석 연휴 때 다른 직원은 다 쉬는 상황에서 나만 일한다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야근 수당을 따로 챙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안 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해야만 했다. 추석 연휴를 갈아 넣는다고 해도 내게 따로 보상도 없는데 회사에 그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군말 없이 야근을 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안된다고 버티는 상황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소개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 걸까?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고 해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이른바 당근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걸 또 덥석 물어 버리게 된다. 그만큼 여자친구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소개팅을 다녀와서는 철야 모드에 돌입했다. 평일은 물론이요. 추석 연휴 때도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소개팅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로 그야말로 지옥 같은 야근이 시작되었다. 추석연휴라고 예외는 없었다. 모든 일정을 캔슬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사람의 의지는 때로는 기적을 불러오게 된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거래처가 원하던 대로 추석 연휴 바로 다음날 베타 서비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며칠 간의 테스트 후에 정식 오픈을 하게 된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이제부터는 그녀를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으니까.


일장춘몽이었을까? 서비스 오픈 이후에 만난 그녀의 분위기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그전까지는 리액션도 좋고 이야기도 잘 통했었는데 뭔가 대충대충 시간을 때우려는 느낌이 강해졌다. 이후로 몇 번의 만남을 가져봤지만 결국에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몰랐었다. 그냥 소개팅이 잘 안 됐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일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회사를 이직하고 나서 과거에 함께 그 회사를 다녔던 동료와 술 한잔을 하던 중에 그날의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대표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좋은 마음에 소개팅을 주선했지만 첫 만남에서 그 아가씨는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이어간 것은 추석 때 내게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손에 놀아난 것이 되고 말았다. 추석 이후에 그녀를 만날 생각에 연휴 내내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마음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사회다. 가끔씩 그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만났을까? 자신 역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함께 만나서 나눴던 이야기와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솔로라는 약점을 가지고 이용당한 케이스가 이쁜 만은 아니었다. 소개팅을 해준다며 자기 대신 야근을 해달라는 직장 동료도 있었고 주말근무를 시켰던 대표도 있었다. 사람은 때로는 잔인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만나는 인연이 제대로 된 인연일리 없다.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전 11화 지인의 오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