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랑요양보호사 교육원에서 만난 기적의 찰나>
휴머니튜드 강의의 마지막 슬라이드는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섬에 갇혀 주변으로부터 주목받는 일도, 이야기를 듣는 일도, 주목받는 일도 없었던 로빈슨 크루소가 있습니다. 몸에 익힌 사회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로빈슨 크루소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을 통해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가게 되었고,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이 세상에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몸이 아파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와상상태에 이르거나 치매 말기가 되면 고립감과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 삶은 섬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 돌봄 자는 프라이데이가 되어주면 됩니다.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가 제3의 탄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에서 휴머니튜드 기법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읽었던 황교진 작가(디멘시아 뉴스 편집국장)님의 [어머니와의 20년 소풍] 도서가 생각납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계신 어머니의 신발이 되어주겠다고 하셨던 작가님의 문장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분의 신발이 되어주고, 소외감과 고립감을 가진 사람에게 “함께”라는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돌봄 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다짐이 생겼다면 그 너머를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프라이데이라는 돌봄자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이런 공부도 하고 노력도 하지만 몇 십 년이 지나게 되면 그때 우리도 로빈슨 크루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게는 30~40년 후가 되겠지만 짧게는 10년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노인이 되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병이 치매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이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때를 바라볼 수 있다면 내 노년의 준비는 지금부터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 노년은 내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건강한 몸을 만들고 정신적인 무장을 하며 경제적으로 노후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도 노년을 위한 준비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만큼 중요한 것이 내가 맞이하게 될 나의 노년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하며 행복한 모습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는 것입니다.
치매 노인에 대한 인식이 낮고, 치매에 관심이 없으며 치매라는 병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치매를 가진 사람을 돌보는 인간중심 케어 방법을 모른다면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도 동일한 돌봄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탁을 넘어 간절하고 간곡하게 요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으로 끝맺음을 하지 말고 다시 시작 버튼을 눌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가 되시기를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양성한 제자들만 9,000여 명이 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들을 가장 많이 공감하는 사람이 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유들을 뛰어넘어 현장에서 열심히 요양보호사의 이름을 달고 달려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문장입니다.
무엇을 뛰어넘은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받기만을 바라는 인생이 아니라 받을 것을 미리 준비하며 나눔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돌봄자 로서 존중하는 돌봄을 하게 되면 그 돌봄의 질이 향상되어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행복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이 법칙을 알고 있는 지혜로운 제자들이기에 아주 많이 사랑하고 아주 많이 존경합니다.
이때 한 가지를 더 부탁드려 봅니다.
휴머니 튜드 기법을 알고 장기요양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하려 할 때 아주 많은 시련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합니다.
장기요양 기관장들을 대상으로 이 강의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들어 본 적 없는 기관장님들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기관장을 포함한 경력이 많은 종사자들이 휴머니튜드기법을 적용하려는 요양보호사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가끔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몰라서 그렇게 안 하나요? 한 번 해보시오. 시간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만이 살 길이라고 전합니다. 옳은 방식으로 돌봄을 하겠다는 투쟁 정신없이 그 좁고 험난한 길을 열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설명하면 이제 저의 이야기를 내려놓습니다.
저 역시도 요양보호사 양성강사로 17년을 투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17년이 지나는 동안 강의비가 단 1원도 상향되지 않았습니다. 강의 1년 차 강사나 17년 차 강사나 강의비의 차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 불만이 쌓여 견딜 수 없었다면 벌써 이직을 했을 겁니다. 요양보호사가 일하는 업무량에 비해 보수를 많이 받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분들을 양성하는 강사는 다를까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요양보호사의 권익이 향상되고 보수가 상승될 때 강사들도 강의비가 상향될 겁니다. 17년을 기다려도 변함이 없는 것이 오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투쟁 중입니다. 한 번도 강의시차를 줄인 적이 없습니다. 요양보호사 강의비 보다 10배 이상을 주는 외부강의가 들어올 때도 요양보호사 강의시간을 우선에 두고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요양보호사 강의비가 1년 치 내 연봉의 1/4밖에 차지하지 않습니다. 외부 강의와 이러닝 , 다른 활동으로 받는 수업이 더 많아진 지 몇 년 되었습니다.
그래도 견디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내가 서려는 것이 아니라 서지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저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독서에서 만난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존재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살려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예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한 번 깨닫고 나면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시형, 박상미 저서
어르신들에게 직접 돌봄을 할 수는 자리의 사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돌봄자 들에게 왜 그 자리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 그리고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와 자질에 대한 교육은 사명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에 서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