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구유언 18화

정치적 올바름, 우정 올바름.

-죽음을 앞두고 서로 눈을 마주하는 진정한 친구 관계.

by 이태승

P.C (Political Correctness)/ F.C (Friendship Correctness)

P.C(정치적 올바름)/F.C(우정 올바름)


P.C(정치적 올바름)란 용어가 시사에 언제쯤부터 사용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롯이 내 탓이다. 요즘은 P.C의 사용빈도가 더 늘어난 느낌이다. 정치, 인종, 종교, 성별, 성적 지향 등 여러 면에서 P.C가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의 처지에 따라 P.C 자체에 대한 정의가 달리 적용된다. ‘정치적 올바름’에서 ‘올바름’이 입장 또는 진영에 따라 달리 적용/사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P.C 사용 예다. 1930년대 둘 다 소련 공산당원인 A와 B의 대화다.

A: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데---.

B: 동무, 말조심하시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A는 자신이 공산당원이지만 미국이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나라임을 말한다. 그에 반해 B는 적대국인 미국에 대해 선의를 갖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한다. 소련 공산당원인 B가 보기에는 A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거다.


또 다른 예다. 가치관이 다른 C와 D의 대화다.

C: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D: 무슨 소린가. 말조심하라. 동성애는 엄청난 죄악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다.


C는 동성애자들도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도 마땅히 존엄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에 반해, D는 동성애 자체가 엄청난 죄악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D가 보기에는 C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거다.


이들의 대화를 ‘정치적 올바름’이란 기준으로 잰다면, 과연 누가 ‘올바른’ 건가? A인가 B인가. C인가 D인가. ‘정치적 올바름’은 그만큼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용어다.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는 ‘올바름’이라면, 그건 이미 ‘올바르지 않’다. 달리 말하면, ‘정치적 올바름’이란 용어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 적용/사용된 걸 수 있다.


이들 4명의 대화에서 정말 중요한 본질은 뭘까. 공산당원이든 아니든, 삶에 있어서 ‘억압과 불평등’ 보다 ‘자유와 평등’이 중요한 게 아닐까. 동성애를 인정하든 아니든, 동성애자라고 낙인을 찍고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라고 저주하기보다는 동성애자들도 존귀한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적 올바름’을 갖고 누가 옳으냐/그르냐의 다툼보다는 인간 삶의 ‘본질적인 면에서 적절성’을 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본질이 훨씬 중요한 게 아닐까.


물론 여기서도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이 있다. 본질적 내용이 올바르다고 그 내용을 전달하는 태도와 방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P.C가 단지 상대방의 말을 틀어막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P.C가 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과 태도 그리고 방식 모두가 ‘올바로 해(적절 해)’야함을 강조한다.


‘Friendship Correctness(F.C/우정 올바름)’란 말을 들어봤는가. 처음 듣는 말일 게다. 내가 만든 말이다. 친구들 간의 우정에도 올바름이란 말을 쓸 수 있는가. 가능하지 않다. 획일적으로 ‘우정’을 정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는 ‘올바름’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우정에 대해 ‘올바름’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우정도 본질이 훨씬 중요하다.


친구라고 말은 하면서도 서로서로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더 논할 이유가 없다. 그건 친구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거짓된 인간관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런 허위의 탈을 쓴 ‘친구 간 우정’은 처음부터 제외하고 말하는 거다. 진정한 ‘친구 간 우정’만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 서로서로 위한다는 굳건한 믿음은 기본 전제로 한다.


우정을 표현하는 태도 또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친구 간 우정’을 엉망으로 만든다. 첫째, 말과 행동이 친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아무리 친구를 위한다고 말해도,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오래된 (듣고 있는) 친구는, (말하는 그의) 진심을 다 안다.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친구를 위한다는 건 거짓이기 때문이다.


둘째, 친구에게 비하 또는 편견 혹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 친구를 깎아내려야지만 자신이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을 해도, 도무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이 무심코 사용한 차별적인 표현이 친구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각성이 있어야만 친구 관계가 이어지고, 더 확장해서 말한다면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서도 교정하지 않는다면, 본질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태도임은 틀림없다.


친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무심코라도 또는 겉으로도 위와 같은 행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친구를 위한다는 마음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에 무례한 언행이 나오는 거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언행으로 표현되는 존재다. 그 무례함으로 받은 상처는 오래된 친구 사이일수록 그만큼 처절하게 깊고 아프다.

그렇다면 이젠 친구도 아니기에 아파하지 마라. 그럴 이유가 없다. 친구라는 존재의 본질은 뭘까. 진정한 친구란, 친구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인, 그래서 아픈---.


황인숙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 시를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는 건가. 시인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지 말라고 호소하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걸까. 아니면 시인 자신이 강에 가서 토로할 지경일 정도의 고통이 있음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시인에게 토로하려는 그 누군가가, 시인의 ‘친구’라고 가정하고 이 시를 감상해보면 어떨까. (독자들에게도 이런 읽기를 권한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천천히 읽어보시라. 진정한 친구란 누굴까를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친구라는 관계는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친구의 수만큼 관계도 상황도 배경도 복잡하다.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건 있다. 환갑이 될 때까지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한다면 더더욱 확실해지는 건 바로 이거다. 친구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있냐/없냐는 금방 알 수 있다.


사오십 년이 넘게 사귄 친구라면 눈빛에서, 호흡에서 친구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진정성이 없는, 거짓된 친구 관계는 지금이라도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누가 진정한 친구일까를 생각하며 황인숙 <강>을 감히 변주했다. (말이 변주지, 거의 복사 붙이기다.)


이길태승 <친구>


네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내게 토로하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내게 침도 피도 튀기며 말하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내게 와서 말하라

네가 직접

내게 와서 말하란 말이다

나도 네게 똑같이 할 테다.

친구여!

요단강가에서 우리

눈을 마주하자//


죽음을 앞두고 서로 눈을 마주하는 진정한 친구 관계. P.C든, F.C든 그 무엇이든 세상만사 중요한 건 ‘본질’과 그리고 그 본질을 전하는 ‘태도’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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