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나였다
이별 뒤의 어느 오후,
아무 일도 없는 날이었다.
특별히 슬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평범함이 낯설었다.
사랑이라는 사건이
내 삶에서 빠져나가자
모든 것이 조금씩 무색해졌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처음에는 무서웠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그 사람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식탁 위에 놓인 잔 하나,
메시지를 확인하는 습관,
주말의 계획까지.
하루의 구조 안에 그 사람이
차지한 자리가 이렇게 많았다는 걸,
떠난 뒤에서야 알았다.
한동안 나는 빈자리를 메우려 애썼다.
일부러 약속을 만들고,
전보다 더 많이 밖으로 나가고,
스스로를 바쁘게 몰아넣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허전함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공백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냥 비워둬야 하는 자리였다.
그날, 산책을 하다
낡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시간을 흘려보냈다.
햇빛이 벽돌 사이로 스며들고,
공기가 어깨 위를 지나갔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구나.”
사랑이 내 삶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말과 표정,
온도에 따라 하루의 의미가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커피를 내리는 아침에도,
혼자 걷는 거리에서도,
나는 나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나로서 존재하는 사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상한 안도가 밀려왔다.
사랑이 내 삶의
가장 큰 사건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랑만이 나를 증명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나였다.
누군가의 곁에 있지 않아도 숨 쉬고,
걸을 수 있고,
웃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다르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대신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보냈고,
누군가의 말을 곱씹는 대신
내 안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에서 알았다.
사랑은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경험이지만,
나를 완성시키는 조각은 아니란 것을.
사랑을 잃고 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그것이 이별이 남긴
유일한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질 것만 같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결국 사라지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그날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