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아닌 길을 따라

빛이 사라져야, 비로소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by 서녘

오래도록 나는 빛을 따라 걸었다.


누군가가 이미 밝혀둔 길,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방향,

그쪽으로 가야 안전하다고 믿었다.


밝은 쪽이 옳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날, 빛이 사라졌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두려움 대신

이상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누구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처음으로

‘내 자리’라 부를 수 있다는 감각.


나는 그 어둠 속에서 길을 보기 시작했다.

빛은 늘 친절하지 않다.


너무 밝은 빛은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그림자가 사라지면 깊이도 사라진다.


나는 한동안 빛에 취해 있었다.

빛이 닿는 곳만이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삶은 빛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도

오래된 숨과, 느린 생명이 있었다.


그건 조용하지만 확실한 진실이었다.


이제 나는 조금 다르게 걷는다.

누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가던 때처럼 빠르진 않다.


하지만 속도가 느리다고 해서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내 발끝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길이 생긴다.


그건 누군가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가 남기는 첫 흔적이다.


가끔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멈춘다.


멈춘 자리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스치는 방향,

발 아래 흙이 내는 소리,

내 호흡의 리듬.


그 소리들이 나를 다시 이끌어 준다.

빛이 있을 땐, 방향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방향보다 감각이 필요했다.


눈이 닿지 않는 대신,

귀와 손끝, 마음이 세상을 더 정확히 읽는다.


그건 배운 적 없는 언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조용히 걸으면, 길이 먼저 나를 알아본다는 걸.

나는 더 이상 ‘밝은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대신 ‘나에게 맞는 곳’으로 가고 싶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빛이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괜찮다.


길은 스스로 존재한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나답게 서 있는 법을 배운다.


밤이 깊을수록 세상은 투명해진다.


별빛이 멀리서 흩어지고,

그 흩어진 조각들이 길의 가장자리에서 반짝인다.


그건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있다’는 작은 증거다.


나는 그 불빛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냥 내 발걸음에 귀 기울인다.


빛이 아닌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어쩌면 그렇게,

세상과 다시 화해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느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다.


누구의 눈부심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빛은 사라질 수 있지만,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


빛이 아닌 길을 따라,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내가 나로 남는 쪽으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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