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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Oct 05. 2022

행복한 상상

이젠 어디서나 '일' 할 수 있는 세상

"아빠, 오늘은 일해?"

"응 그럼, 아빠 연차도 안 쓰고 항상 일 하고 있었어! 회사를 안 나간 거뿐이지"


 큰 아이와 어제 나눈 대화 내용이었다.

아빠가 요새 규칙적(?)으로 회사를 안 나가고, 아침 9시나 돼서야 일어나는 걸 보더니, 아빠를 노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우리 동료들이 들으면... '너희 아빠 그렇게 노는(?) 사람 아니다'라고 다들 한 마디씩 해줄 거 같다. 


 정확히는 올해 8월 중순 이후부터, 재택근무를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PC 성능, 그전까지는 회사에서 보급받은 지 4년 가까이 돼가는 PC를 사용하느라, 느려도 너무 느렸다. 포맷을 주기적으로 해주면 좋겠지만, 내 성격이 그렇지 못하다 보니, 그 PC는 4년 내내 혹사 아닌 혹사를 당했던 것이다. 거의 교체 막판 되어서는 업무 PC로서의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퍼포먼스가 낮아졌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보급받은 지 3년이 지나면 교체 신청을 할 수가 있는데, 귀찮아서 안 하고 있었다.

사실 새 PC를 받아서 이것저것 세팅하고 개발환경 잡는데만 족히 하루는 걸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거 같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업무 PC는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그제야 새 PC를 신청했다. 

 나는 사실 새 PC를 신청하기 전까지만 해도 요청하면 바로 받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코로나로 인해 중국 도시 전체가 셧다운이 되는 등, 물동이 중간에 막히면서 약 한 달 동안을 숨만(?) 쉬는 PC친구와 겨우 업무를 이어 나갈 수가 있었다. 교체 신청한 지 약 한 달 반이 되어서야, 겨우 새 PC를 수령하여 이것저것 환경을 구성할 수가 있었다.


"뭐 이전 거랑 다르겠어? 제조사도 같은 제조사 건데"

나는 PC에 대해 잘 모른다. 고고 익선과 다다익선 정도만 알아서, 램, CPU, 용량 등이 높고 많으면 좋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내가 받은 신규 PC의 램이 32GB나 되는 줄 몰랐다. 정말 요새도 신세계를 경험 중이다. 아무리 PC를 오래 잠가놔도, 바로 버벅거림 없이 열린다. 여러 개 업무를 동시에 띄워도 버텨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업무 PC의 퍼포먼스가 드라마틱하게 올라가면서, 집에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이전에 비해 불편한 부분이 많이 감소되었다. 그에 따라 나도 조금씩 일수를 늘리며 재택근무를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추가로, 회사에서 일하는 환경과 비슷하게 갖춰 놓기 위해, 나름 집에는 외장 모니터도 구비해 놨고, 무선 키보드 무선 마우스도 꽤 고급형으로 꾸려서 업무에 임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집에서 일할 때에도 회사 가서 일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90% 이상의 퍼포먼스는 유지가 되는 거 같다. 나머지 10%는 집에서는 동료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으니, 그러한 비 업무적 커뮤니케이션이 살짝 아쉬울 뿐, 집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요새 알아가고 있다.


 사실, 작년까지 나는 재택근무 회의론자였다. 

작년, 함께 일했던 동료 중 한 명이 집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던 적이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을 가져올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회사로 나와 이야기하며 업무를 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 '꼰대'취급할까 봐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당시엔 재택근무를 하면 퍼포먼스가 낮아진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나는 작년에는 지금처럼 재택근무를 활성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공감하지 못했던 거 같다. 물론, 그 동료의 퍼포먼스는 아직도 나쁜 의미로, 잊히지가 않는다.


 요 근래는, 나 또한 재택근무의 맛(?)을 알아버렸다.

근무하면서 가장 좋은 건, 앞서 서술했던 비 업무적 커뮤니케이션이 빠지게 되면서, 나만의 개인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안 되지만, 피곤할 때는 조금 엎드려서 잘 수도 있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조금 더 길게 산책도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시간이 조금 더 확보되는 건 매우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나 또한 이제는 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나와 일하는 다른 동료 대부분이 재택을 하기 때문에, 내가 회사에 간다고 해서, 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오프라인으로 할 수는 없다. 이미 우리 팀원들은 모두 온라인 미팅에 익숙해져 있고, 필요하면 누구든 업무시간에 바로 전화해서 궁금한 부분을 해소하고 일을 진행하는데 길들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회사를 가는 이유는, 정말 헤비 한 업무를 맡아 조금 더 좋은 가구와, 넓은 공간에서 일을 해야 할 때, 혹은 커뮤니케이션이 너무나도 필요하여, 모두가 회사를 나와야 할 때가 아니면, 나 혼자 회사를 나간다고 하여 일하는 방식이나 퍼포먼스가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보, 우리 이사 갈까? 좀 더 넓은 집으로, 서울 밖으로"

"왜?"

"아니... 일주일에 내가 회사를 2번 정도밖에 안 나가는데, 굳이 이렇게 좁은 집에서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나 해서..."

"그것도 맞말인데... 애들 학교가 가장 중요해"

"맞아...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고"


 어제저녁에는 와이프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와이프한테는 서울 밖으로 정도의 표현을 했지만, 나는 어제 '제주도'에서 사는 상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서울로 출퇴근해서 살아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망상은 아닌 게, 이미 업무를 하는 방식 자체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이 익숙해지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회사에 나와서만 일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일주일의 한번 정도는 서로 협의해서, 오프라인 회의를 하게 된다면 섬을 떠나 서울로 가서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사실 제주도로 이사 가는 건 거의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교외의 큰집 정도는 정말 가능하지 않나..?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닭장 같고, 사람이 바글대는 도시보다, 한적한 교외가 나는 좋지만, 그것도 현실적으로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선택하기는 어렵다. 만약 우리 부부가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교외 넓은 집으로 가거나, 제주도에서 살아보는 선택을 정말 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활동의 제약이 생겨 안 좋은 점들도 많았지만, 반대로 우리 사회에 던져준 뉴 노멀 한 현상들도 많다고 생각되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재택근무의 일상화'인 거 같다. 

 정말 나중에, 우리 두 아이들 모두 성인이 되어, 기숙사든 원룸이든 하나씩 얻어주고, 나는 공기 좋고 한산한 데에서 여유롭게 일을 해보고 싶다는, 행복한 상상을 오늘도 하고 있다. 


일상에, 변화의 작은 바람개비들이 불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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