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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담 Oct 10. 2023

선생님이 별 건가

배울 게 있으면 선생님이지

 사진기를 자주 들고 다니던 예년 같으면 계절의 변화 시기를 더욱 금방 알아챘을 테지만 올해는 비교적 그런 시간이 덜해 그런가, 계절의 바뀜을 쉽게 체감하지 못했다. 다만, 한강공원등 야외 달리기를 할 때에 땀으로 옷이 덜 젖는 것을 봐서는, 가을이 깊어졌음을 체감하곤 한다. 


 의존 (brunch.co.kr)이라는 글에서, 아쉽게도 '그깟 스마트 워치' 때문에 내가 목표했던 20km 달리기 완주를 하지 못했다는 글을 적었 던 바 있다. 이젠 이미 지나갔지만, 10월의 마지막 연휴였던 한글날 때, 필히 못다 이뤘던 하프 마라톤의 기록을 꼭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연휴날이 찾아오면, 사람은 집에서 쉬고 싶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그저 집에서 누워 유튜브를 보거나, 낮잠을 자는 게 그렇게 달콤하고 좋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제 한글날 연휴 간 하프 마라톤을 뛰겠다고 다짐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10월 8일, 연휴가 아직 '한방' 남았던 저녁,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한강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찰나, '기안 84'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림만 그릴줄 알고, 운동 잘 못할 거 같은 그 웹툰 작가 아닌가...?' 

 우리 집에 TV가 없기도 하고, 기안 84의 대표 예능 출연작인 나 혼자 산다 라는 프로그램도 딱히 내 취향은 아니라서 안 보고 있었지만, 그 작가는 나와 나이대도 비슷하고, 어딘지 모르게 '친근' 한 이미지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정도로 잘 뛰는 사람인지는 몰랐었다.

"한다면 하는" 기안 84, 42.195km 마라톤 풀코스 완주 [이슈 iN] (imbc.com)


 그의 마라톤과 관련된 기사를 더 흥미롭게 검색해 봤는데, 7년여의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해왔다고 하더라. 꽤 오래 달렸구나, 기사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다 보니, 그도 나처럼 달리기를 통해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해 왔겠다는 생각을 하니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러닝크루 없이 혼자 18km까지 달린 게 가장 오래 달린 기록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18km까지는 아니었지만, 내 종전 기록이 17km였으니, 그의 마음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외롭고 굉장히 지루한 과정이지만, 나는 무언가 막혀있는 내 주변상황을 홀로 '돌파' 한다는 느낌으로 외롭지만 즐겁게 달리곤 하는데, 그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하튼, 그는 나의 '러닝 크루'이자 '달리기 선생님'이었다. 그가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또한 강한 동기를 부여받아 바로 옷을 착장 한 채, 운동화를 신고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그때 못다 한 20km, 오늘 완주하자'

 달리기 시작 전 애플워치의 배터리를 다시 체크했다. 100%로 완충되어 있었다. 아무리 달리기가 좋다고는 하나, 혼자 두 시간 넘게 지루한 레이스를 할 수는 없었다. 시계에 내 기록을 의존하여 달려도 좋다. 목표만 완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껌껌한 어둠이 짙게 깔린 한글날 전날 밤, 내가 주관하고 내가 참가한, '고독한 하프 마라톤 대회'가 시작되었다.


 자정즈음의 한강공원은, 달리기가 너무 좋았다. 물론 길이 어두워서 살짝 무섭긴 했지만, 자전거 동호인들도 없고, 산책 나온 시민들도 많이 안 계셔서 자전거 도로를 타고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 페이스는 나쁘지 않았으나, 역시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 파워와 케이던스가 지속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엔 기어코 20km를 완주해 보겠다는 다짐 하나로 달리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18km 구간까지 왔다. 보통 완주 2km 전이 가장 나에겐 고비다. 왜냐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르막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내리막이라 좋지만, 마지막 목표점을 앞두고 찾아온 오르막 길은 정말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 해 뛰게 만드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미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하였기에, 호흡이 가팔라져 숨이 헉헉 찼고 다리의 힘은 풀려 '빠르게 걷는 수준'으로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었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오직 나를 이겨내야 하는 '고독한 레이스'를 어떻게든 이어 가고 있었다.


'19.7...19.8...19.9...'

시계만 계속 쳐다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왔으면 걸을 만도 한데, 걷고 싶지 않았다. 걸을 거면 뭐 하러 뛰러 나왔나 하는 생각에 어떻게든 마지막 힘을 짜내었고, 마침내 20.0km가 찍히자마자 시계에서 운동을 종료했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버렸다. 한 5분? 정도를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있다가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해냈다는 생각에 들뜬 것도 잠시. 아무래도 저녁을 먹고 무리하게 뛴 게 화근이었나 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 변기에 내 속을 모두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속을 게워내고 난 후에 양치질을 하니 너무나도 기분이 개운해졌다. 방에 누워 시계가 작성해 준 내 기록을 보니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뿌듯했다. 드디어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온몸에 밀려왔다.


 어릴 적엔, 무언가를 나에게 직접 가르쳐 주어야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후, 다양한 환경에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곤 하였다. 그중엔 비록 '저렇게 되진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가 많긴 했지만 말이다.


 기안 84는 나 홀로 개최한 하프마라톤을 뛸 수 있게 트리거 역할을 해준 '선생님' 임에 틀림없다. 

선생님의 풀코스 마라톤 완주 기사가 없었더라면, '하루 밖에 남지 않은 연휴' 라며 집에서 탱자탱자 놀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나의 나태함에 번쩍 정신이 들게 해 준 '회초리' 같은 역할을 잘 맡아 주었다.


 주변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나에게 이야기한다. 갑자기 왜 달리기를 하냐고 말이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와의 한계를 이겨내 보고자 달리게 되는 거 같다. 경쟁은 오직 '어제의 나'와만 하는 것이지, 타인과 하지 않는다는 점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직 달리기 체력이 강하진 않은 탓인지, 20km 달리기를 해낸 지 정확히 이틀이 되었지만, 걸을 때 양쪽 허벅지가 살짝 불편하다. 아픈 건 아닌데 불편함이 있다. 그래도 이 또한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아주 맨 처음, 5km를 완주했을 때와 비슷한 통증이다.


 오늘의 빛담에게는, 20km 완주가 한계겠지만, 내일의 빛담은 아직 한계를 재단하지 않았다.

22km, 24km, 26km , 30km 이렇게 점점 늘리다 풀코스를 완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런 희망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 또한 내 주변 동료나 친구들에게, 기안 84 같은 '선생님' 이면 좋겠다. 학군단 시절 항상 달리기를 꼴찌 하던 저질 체력왕. 뛰는 요령과 동기가 없어 못했었던 것일 뿐, 튼튼한 두 다리와 나름 튼튼한 몸을 갖고 태어났던 것이 나이 마흔이 다돼 갈 무렵 발견(?) 되어 뿌듯함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음에 감사하다.


진짜 이깟 뱃지가 뭐라고... '최장 거리 달리기 운동'의 거리가 점차 늘어감에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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