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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밖의 만류, 그리고 번복

by 빛담

“O프로님, H프로님, 회의실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나를 지키기 위한 첫 문장’을 내뱉은 지 2주가 지났다.

그간 주변 동료들에게 프로젝트를 내려놓겠다는 뜻을 알렸다. 대부분 “잘 결정했다”, “수고 많았다”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래서일까. 이번 미팅에는 미련 없이 내가 준비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잔존 개발 과제, 코드 품질 향상 방향 및 그에 대한 인력 분배안까지. 그 이후 나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볼 요량이었다.


회의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흘렀다.

내가 설명한 운영 이슈와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은 다들 큰 이견 없이 받아들였고, 불과 5분 만에 안건은 정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프로님들 사실 2주 전, 매니저님께 이 프로젝트를 그만 두고 싶다 말씀 드렸습니다.
5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며 매너리즘에도 빠졌고, 무엇보다 고객과의 반복된 마찰 속에서, 제가 그간 해온 일들이 부정당하는 감정속에서 제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회의실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O프로님과 H프로님. 두 분 다 나보다 오래 회사생활을 해온 든든한 선배들이시다. 헌데 지금까지 “수고했다”는 말들로 응원해주던 동료들과 달리, 두 분의 표정은 조금 어딘가 많이 달라보였다. 차분했지만 어딘가 복잡한, 눈빛과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O프로님이 먼저 깨셨다.


“빛 프로, 지금 프로님이 빠진다는 건 우리 팀이 문 닫겠다는 말과 같아요.
나는 회사에서 프로님처럼 정확하고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프로님의 자리를 나보고 채우라고 하면, 나도 다른 데 알아볼 수밖에 없을거 같아요.”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이런 강한 만류는 예상하지 못했다.

2주전 면담했던 매니저는 아무 말 없이 내 결정을 받아들였고, 나의 거취와 관련되어 이야기를 건냈던 동료 대부분은 ‘그럴 수 있지’라며 등을 토닥여주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나는 선배의 진심 어린 말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더이상 진급 포기할 건가요?

지금 다른 데 가면, 당신을 챙겨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늦지 않았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속에 오래도록 눌러 담았던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다잡았다. 내가 남는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객은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해올 것이고, 나는 그것을 막아보려 애쓰다 결국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 일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겠지. 돌이켜 보면, 그게 내가 팀 리더로서 가장 보여주기 싫었던 모습이었다. 애써 버티다가 무너지는 장면.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지금껏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드러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한 팀원을 도우려다 오히려 가해자처럼 몰렸고, 그걸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의 매니저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정말 많이 억울했지만, 나의 해명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생긴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나를 흔들고 있었다.

또한, 프로젝트 초반 함께했던 고객사 담당자들과의 호흡은 어느새 흐려져만 갔다. 사람이 점차 바뀌어 가고, 분위기가 바뀌고, 그에 따라 나 또한 지쳐갔다. 결국 팀을 위해 헌신해도 돌아오는 건 격려가 아닌 날선 피드백 뿐이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마음의 무게가 결국 이번에 나를 무너뜨린 것이다.


빛 프로, 그렇게까지 힘든 줄 몰랐어요. 내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게요.
이제 나도 회사생활에서 크게 아쉬울 게 없어요.” O프로님의 공감에 나는 숨이 턱 막히는거 같았다. 메인 안건은 5분 만에 끝났지만, 시계를 보니 어느덧 30분이 흘러 있었다. 서로 말없이 앉아, 숨을 내쉬고, 감정을 가라앉히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온 O프로님의 목소리.


“빛 프로, 설사 당신이 기대한 것보다 회사의 평가는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다시한 번 말하지만, 지금부터가 프로님께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나가 떠돌이처럼 지내면, 정말로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요.
진급, 인정, 기회… 다 포기할 건가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예요.” 그 말은 나의 아픈 부위를 정교하게 찌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단순히 성과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이 일을 위해 애썼는지를, 누군가 알아봐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H프로님이 조용히 말을 이어주셨다.


“빛 프로님, 후회할 일 만들지 맙시다.
지금 상황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고객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도, 결국은 단련의 일부입니다.”


결국 나는, 번복할 수밖에 없었다.팀을 떠나겠다는 내 결정을.

다소 모양 빠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두 동료의 진심과 따뜻함 앞에서 내 마음은 자연스레 돌아섰다. 그들은 내 감정의 악취마져도 고스란히 받아주었다.그리고 함께 다시 걸어가자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나는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고객의 요구가 아무리 많더라도, 동료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다짐했다. 부족한 나를 믿어준 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다시 정신을 차리겠다고.조금은 더 단단한 모습으로, 다시 걸어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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