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온전히 털어놓은 하루.
평소엔 시간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어 묻어두기만 했던 감정들이 조금은 정리됐다.
결국, 버티고 무시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지만 그전에 내 감정이 다 타버릴까 봐 두렵다.
그래서 오전의 상담사님은 ‘마음 관리’를, 오후의 상담사님은 ‘현실 직시’를 말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은 감기로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평소보다 더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빛담님, 참 힘든 상황이시겠네요... 우리 어떻게 이 상황을 이겨내면 좋을까요?"
"점괘를 봐서는, 두 분 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적당히 무시하시면서 지내셔야 할 것 같네요."
마치 복사한 듯한 피드백이었다. 같은 말, 같은 결론.
그렇다. 나는 지금 일과 관련해, 너무나도 무례하지만 내가 대적하긴 어려운 사람과 대립 중이다.
이전 글 ‘중요한 나를 지키기 위한 첫 문장’과 ‘예상밖의 만류, 그리고 번복’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그 사람과 같은 업무 메신저 방에 있는 것, 그가 나를 태그해 지시를 내리는 순간, 심장이 조여오듯 긴장된다.
내가 보기에 그는 타인에 대한 예의가 없다.
지금껏 내가 본 그의 행동과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 내린, 나름 객관적인 판단이다. 지난 5월, 그와 업무적으로 크게 부딪힌 후 활기를 잃어 버린채 생활하게 되었고, 퇴근 후에도 그가 불현듯 떠올라 안절부절할 때도 있었다. 가끔은 수많은 업무 메일을 확인하며 해결되지도 않을 걱정에 잠을 설치고, 안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한 날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내는 4년 전처럼 사내 심리상담센터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사실 그녀는 우울증 약을 권하기도 했다. 이걸 먹으면 좀 나아질 거라고. 나는 거절했다. 사약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그 약을 먹어도 몸에 문제 없다는 걸 알아도, 그때의 나는 내가 불안해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약 대신, 상담센터에 꼭 가보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오늘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킨 날이었다.
4년 전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상담사님은 날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잠시 지난 이야기의 후속을 들려드렸고, 상담사님은 기억을 더듬듯 몇 가지를 물으셨다. 그러곤 현재의 상황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준 업무 외에 다른 일도 계속 시키면서 빨리 끝내길 원해요.’
‘작업자를 배려하지 않아요. 모든 게 다 이슈래요.’
‘공개된 업무 채널에서 나를 무시했고, 큰 모멸감을 느꼈어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상황부터, 이후 변곡점, 지금의 대립까지 내가 처했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현재 내가 처해있는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그녀에게 어필했다. 상담사님은 객관적 조언보다 공감에 집중해 주셨다.
"아이코~", "어쩌면 좋아요~" 하는 작은 리액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다만, 상담 말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다 보니, 누가 나가기 전까진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사실 현재 나는 조직에 미련은 없지만, 만약 옮긴다면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대는 낮춰졌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상담사님은 그정도로 힘들어 하는 상황인줄 몰랐다며 걱정어린 눈빛을 내게 보였다.
그렇게 상담은 빠르게 지나갔다. 상담사님은 2주 뒤, 일상에서 화를 조절하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비록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지만, 누군가 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여보, 사진 에세이 책 서점에서 절판되었다고, 3권 더 가져다 달래. 당신이 가볼래?”
“내가...? 흠... 그래, 가보지 뭐.”
“응, 거기 사장님 타로 잘 봐주셔. 꼭 타로 한번 봐달라고 해.”
감기 기운이 있었던 나는 오전 상담 후 급격한 피로감에 점심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주변 소음이 거슬려 이어폰을 끼고 자려 했지만, 푹 쉬지 못했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는 일 없이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내의 부탁이 떠올라 독립서점으로 향했다. 구의역에서 900m쯤 떨어진 곳. 말이 서점이지 사장님의 작업실이자 서고 같은 공간이었다. 문을 조심히 열자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가져다 드리기로 했던 책 3권을 건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사장님, 아내가 꼭 타로점 봐달라고 해서요. 괜찮으세요?”
“오... 고민이 있으신가 봐요? 그럼요, 해드릴게요.”
그는 조심스레 타로 카드를 꺼내더니 어떤 점을 보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올해 초부터 같이 일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과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나는 ‘올해 말쯤엔 떨어질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두 장씩 카드를 뽑아달라 했다.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카드를 골랐다. 내가 뽑은 카드를 뒤집어 펼쳐 보이고는 그가 말했다.
“두 분 다 고집이 세시네요. 한쪽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관계는 계속될 거예요.
그 사람은 자신이 윗사람이라고 여기고, 당신이 말 잘 안 듣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안타깝지만, 올해 말까지 이동운이 없네요. 불편한 동거가 계속될 것 같아요.”
“결국 버티면서, 적당히 무시하셔야 해요.”
그는 점을 정리하며 내게 조언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는 말. 나는 혀를 끌끌차며 멋쩍게 웃으며 사장님께 귀한시간 내어 주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넨 후 자리에서 나왔다.
생애 첫 타로점이었다. 미신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만큼 약해져 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 대해 두 명의 타인에게 온전히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오전의 상담사님은 화를 조절하며 살아남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했다.
오후의 상담사님(서점 사장님)은 그 사람이 나와 헤어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내려놓고 잘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온전히 털어놓은 하루.
평소엔 시간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어 묻어두기만 했던 감정들이 조금은 정리됐다. 결국, 버티고 무시하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지만 그전에 내 감정이 다 타버릴까 봐 두렵다.
그래서 오전의 상담사님은 ‘마음 관리’를, 오후의 상담사님은 ‘현실 직시’를 말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은 감기로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평소보다 더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